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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호 Jan 23. 2023

상상도 못 한 만남을 준 서체

일에 대한 생각

윤디자인은 지방자치단체의 비주얼 아이덴티티 시스템의 일환으로 개발되는 ‘도시 서체’ 개발의 시작점이 된 서울 서체(서울 한강, 서울 남산체)를 개발했고, 2013년에는 별도로 지방자치단체를 전담하는 담당을 두었다. 대부분의 서체회사는 이렇게 세분화하여 영업 사원을 두지 않지만, 공공 디자인의 초석이 되는 일에 가치를 두고 200여 개의 도시에 담당 부서를 조사하고 각 지방자치단체의 담당자께 2개 월마다 연락했다.


“안녕하세요. 주무관님, 잘 지내셨지요?”

“강 선생님, 저희는 아직 예산이 없어서요.”

“아, 도시 서체 개발 말고, 그냥 안부 전화드려요.”


영업전략 2 본부에 입사해서 국책과제 R&D과제를 수행하며, 틈나는 대로 지방자치단체에 전화를 한 지 3년 차가 되면서 점차 내 목소리만 들어도 주무관님들이 내가 전화한 줄 알게 됐다. 울산광역시는 특히 200여 개 도시 중에서도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생가가 있는 곳이고, 한글문화예술제, 외솔한글한마당, 외솔기념관 등이 있는 곳이기에 더욱 관심이 갔었다.


어느 날은 찾아뵙고 싶다고 했더니 담당 주무관이 내려오라고 연락을 주셨다. 기쁜 마음에 영업본부 정승환 과장님과 타이포디자인센터 이현호 대리님을 모시고 내려갔다. 하지만 담당 주무관은 급한 국회 요청 자료 응대로 시간을 내어주지 않았고, 서울에서 울산까지 내려왔는데 허탈한 마음이 컸었다. 회사에서는 직원 3명이 내려갔는데 만나지도 못했다는 보고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난감했다.


회사로 올라가기 전에 복잡한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그간 3년을 지방자치단체에 연락해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하던 울분 때문에 태화강가를 걸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과장님과 대리님의 격려에도 마음이 다 잡히지 못하고 걷다 벤치에 앉았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먼저 말을 걸어오셨다.


“자네, 무슨 일이 있나”


벤치에 앉으신 할아버지께 준비해 온 자료를 펼치며 설명했다. 울산에 내려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도 못하고 올라갈 뻔했는데 잘 됐다 싶은 마음에 20분을 이야기드렸다. 지방자치단체에 각 도시마다 고유한 글꼴(서체)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드렸다. 특히, 울산은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님이 있는 문화도시로, 앞으로 울산이 공업 도시에서 문화콘텐츠 기반의 도시로 성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인적 유산이라고 이야기를 드렸다.


한참을 이야기 들으시던 할아버지는 명함을 주시면서 “외솔 선생님도 자네 이야기를 들으면 참 기뻐하셨을 걸세.”라고 말씀하셨다. 이성태 남목초등학교 교장이라고 적혀있었고, 뒷면엔 ‘외솔회 이성태 울산 회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외솔회 회장 이성태’


울산시청에 담당자가 바빠서 만나지 못해 태화강가에서 하염없이 푸념, 눈물을 흘리던 날에 받은 명함에 전율이 흘렀다. 그리고 있는 그 자리에서 울산시의회 김정태 운영위원장님께 전화를 걸어 꼭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여 다음 날 아침 9시에 약속을 잡아주셨다.


들뜬 마음으로 이성태 회장님은 김정태 운영위원장님께 내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셨다. 그 자리엔 정승환 과장님, 이현호 대리님도 함께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왔다.


울산광역시 국어진흥조례 제정에 앞장선 김정태 위원장님은 울산이 한글을 문화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무척 애쓰는 국내 유일의 도시지만 울산만의 정체성을 담은 전용서체가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하셨다.


당시 신개념에 가까운 글꼴(서체)에 대해 진지하게 자료를 검토해 주셨다. 한글도시 울산의 정체성이 담긴 독특하고도 고유한 울산서체를 개발하는 것에 뜻을 함께해 주셨다. 영국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서체’, 브리스톨의 ‘브리스톨 트랜지트’ 프랑스 파리의 ‘파리진’, 처럼 외지인이나 관광객들이 이들 도시의 글씨체만으로도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고 이야기를 전했다.


국내에 ‘서울서체(한강체, 남산체)’를 개발한 서울시, 부산시의 ‘부산체’, 광주시의 ‘광주체’, 전북도의 ‘전라북도체’, 제주도의 ‘제주한라체’도 전용서체의 개발을 이미 마쳤고, 전남도 역시 내년(2016년)을 겨냥해 개발을 서두르고 있자고 설명했다. 순천시, 포천군, 예산군을 비롯한 많은 기초자치단체에서도 지역 특색을 살린 서체를 개발했다고 이야기드렸다.


내가 어떻게 태화강가에서 외솔회 회장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상상이나 했을까. 한글을 사랑하고, 다음세대를 사랑하고, 한글 학자 최현배를 사랑하고, 울산을 잘 아는 이성태 회장님이 오히려 나보다 더 가슴 뛰며 김정태 위원장님께 설명하시던 날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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