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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20241203/화/맑음

by 정썰
#산티아고_순례길 #이정표

수녀 작가 조이스 럽(Joyce Rupp)은 예순을 앞두고 6주간 동료 톰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느긋하게.

너무 느긋하게 일독을 마쳤다. 7개월은 걸린 거 같다. 책 한 권 읽는데.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확실한 건 그렇게 일고 싶었고 읽어도 될 거 같았다. 느긋하게 읽고 싶었다. 천천히 걸으며 읽었다. 아주 천천히.


산티아고(Santiago, San Tiago)는 ‘성 야고보’를, 카미노는 스페인어로 도로, 여정, 길, 보도를 뜻한다. 앞에 ‘The’를 붙이면 보통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리킨다.


버킷리스트에 산티아고 순례길 종주를 넣어 두었다. 오래전에. 그리고 깊고 어두운 심연에 가라앉았을 때 떠올리며 중고서점으로 산티아고 순례기를 찾아 나섰다.

많지는 않았지만 셀럽이 쓴 가벼운 글부터 산티아고 순례길 전문가를 자처하는 듯한 글도 있었다. 결정적인 제목이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 느긋하게 걸어라‘.

제목 자체가 주는 위안이라니.


생장피드포르 - 론세스바예스 - 트리니다느 데 아레 - 사수르 메르노 -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테야 - 비아마요르 데 몬하르딘 - 로그로뇨 - 벤토사 - 아소프라 - 그라뇬 - 토산토스 - 아타푸에르카 - 부르고스 - 온타나스 - 보아디야 델 카미노 -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 - 레디고스 - 사이군 - 엘 부르고 라네로 - 레온 - 아스토르가 - 라바날 델 카미노 - 엘 아세보 - 폰페라다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 루이텔란 - 오 세브레이로 - 트리아카스텔라 - 사리아 - 포르토마린 - 에이레그세 - 코토 - 아르수아 - 아프카 - 산티아고.


겉표지 안쪽에 서울지하철 2호선 노선도처럼 그려진 산티아고 가는 여정만으로도 책값을 뽑았다고 생각했다. 내용은 예상치 못하게 흘렀다. 다리로 걷는 여정보다 더 길고 힘든 영적, 감성적 순례길. 이해인 수녀님께서 주신 “이 책에 귀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나도 행복한 순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라는 서평에 더해, 돈과 시간이 되도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훅하고 올라왔다. 생생하다 못해 4D로 느껴지는 불편함과 거북함을 견뎌낼 수 있을까? 우물은 보이지도 않는데 숭늉 원샷.


“여정이 몇 주째로 접어들면서 마치 그날이 그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루하루의 의미에 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여러 날이 하나의 커다란 흐리멍덩한 덩어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 (p.304) 여정을 마무리하며 기록에 대한 소회는 매일 일기를 연재하는 마음과 같아서 덤으로 얻은 위로. 느긋하게, 하지만 꾸준히 걷자.


책꽂이에 잘 보관해두고 결전의 그날이 정해지면 출발 전 다시 일독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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