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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지(無名指)

20250213/목/맑음

by 정썰
#약지 #무명지 #왼손 #헌혈

67번째 헌혈. 동기부여는 다양하다. 초코과자, 음료, 영화관람권. 선물도 좋지만 ‘O형 피가 모자라요.’가 제일 강력하다.

오늘은 날짜가 움직이게 했다. 쉬는 날인데 마침 13일이다.

숫자 1과 3을 붙여 쓰면 알파벳 B가 된다. 매월 13일 헌혈의 날.

‘레드커넥트’라는 어플을 통해 전자문진을 먼저 한다. 어플을 통해 예약도 할 수 있고, 문진도 할 수 있고, 내 헌혈 역사도 볼 수 있다. 스탬프를 찍는 재미도 있는데 (난 이런 거 참 좋아해) 오늘 헌혈의 날 도장을 찍고, 다음 달 생일에 맞춰 한 번 더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조금 멀리 떨어진 단골 헌혈의 집으로.


작년 9월에 마지막 헌혈 하셨네요.

헐,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씩은 하겠다는 약속도 지키기 힘들다.

오늘은 어떤 헌혈로 하실래요?

전혈 헌혈은 8주 간격, 혈소판과 혈장 헌혈은 2주 간의 간격을 두고 진행해야 한다.

성분헌혈 할게요. 그래야 3월 헌혈이 가능하다.

O형 혈액이 필요한데 전혈도 가능하실까요?

물론이죠.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 하는 거니까.

왼손 약지를 살짝 찔러 검사용 피를 뽑는다. 팔뚝에 바늘을 꽂을 때보다 이때가 더 아프다. 늘. 간호사님께 물어보진 못했는데 집에 와서 동그란 반창고가 붙어있는 손가락을 보다 문득 궁금했다. 67차 만에.

왜 간호사님은 늘 내 왼손 약지에서 검사용 피를 뽑을까? (정말이지 늘 그랬다.) 왼손이야 내가 내밀었으니 그렇다 치고 왜 약지일까? 나만 궁금해? 녹색창에 나 같은 사람이 올린 질문이 있다. 답은… 별로다.

해부학적 이유로 넷째 손가락만 치켜세우기 힘들다기에 직접 해보니 그렇다. 그렇구나 찔려서 아파도 반응하는 민감도가 떨어져서 그런가 보다. 안중근 의사의 단지도 예로 들었다. 열 손가락 중 없어도 견딜만한 손가락이라고. 어쨌거나 안중근 장군과 왼손 약지로 겹친 경건한 하루.


무명지(無名指)라고 이름도 붙여주지 않은 아픈 손가락. 그래도 소중한 결혼반지를 차지한 손가락.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사람들은 심장과 가까이 있는 왼손 약지를 '사랑의 정맥'이라고 불렀다고 하고, 중국에서는 엄지는 부모님, 검지는 형제, 중지는 본인, 약지는 배우자, 새끼손가락은 자식을 상징했다고 한다.)


이름 없는 민초들이 지켜온 나라. 계엄 정국에서 늦은 밤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여의도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의 사연을 들었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킨 숭고함에 마음속으로 참회록을 몇 번이나 써본다. 반창고로 덮인 왼손 약지를 쓰다듬어 본다. 헌혈의 시작. 수고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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