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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다시 18화

#용서

#화해 #치유 #리쌍

by 정썰

‘다들 감사~ 긴 자숙?의 시간을 마칠 때가 된 거 같네… 열심히 살겠습니다~’

아들 수능 정시 합격 이슈로 대학동기 단톡방에 오랜만에 인사글을 남겼다. 친한 친구가 좋은 소식이라고 널리 퍼뜨려주었고, 반가운 친구들의 축하 메시지에 최소한의 답례.

‘니가 왠 자숙??’, ‘누구 죽임?’

‘나… 셀프…ㅎ’

찐친의 농반, 진반 멘트에 답글. 이건 백퍼 진담.

난 겸손보다 용서가 어려웠다. 특히 나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치는 나에 대해.

관악국민학교 1학년 남자아이는 받아쓰기 90점에 울고 말았다. 짝꿍 지은(아직까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건 뛰어난 기억력이 아니라 병이 아닐까)이는 100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너진 자존심에 엄마 앞에 시험지를 내밀며 또 울었다. 어른들은 내 공부 욕심이 기특했었나 보다. 다음에 잘하면 된다는 위로는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독이었다. 참 한결같은 패턴. 고2였나 3이었나. 시험 성적이 나온 날 저녁. 난 내 방 전신거울 앞에서 주먹질을 해댔다. 소심함은 남아 거울이 깨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울 속 녀석은 눈물범벅이 될 정도의 타격감이었다.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가 거울에 잠깐 스쳐갔고, 아무 말도 못 하셨다. 대학에 떨어진 재수생 놈도, 감찰 조사 끝에 거짓말쟁이가 된 소령 놈도 용서가 안 됐다. 재수 생활은 엄격했고, 거짓말한 장교는 전역해야 했다. 그리고 팬데믹의 정점에서 직장을 잃은 영업맨은, 고마운 고객과 끝까지 가지 못한 보험설계사는… 긴 자숙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부정의 시간은 짧았고, 분노의 광야에서 목적지를 잃고 헤매고 있었다. 언젠가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만난 드라마의 주인공(조정석 배우었던 거 같은데, 정확하진 않다.)처럼. 부정과 분노가 현실을 드라마틱하게 바꿔주진 않았고, 드라마보다 길었다. 출근길은 어색했고, 늦은 귀가 후 주린 배를 채우던 밥은 자꾸 목에 걸렸다. 충고를 가장한 비난의 상처는 잘 아물지 않았고, 위로를 가장한 과한 연민은 ’반사!’할 수 없어서 삼키는 척해야 했다.

상실의 5단계라고도 했고, 분노의 5단계라고도 했다. 다음 단계는 현실과의 타협이었고, 타협의 다른 이름은 포기였다. 이후 딱히 단계를 나눌 겨를 없이 우울이 스며들기까지는 일사천리였지만, 수용은 어려웠다. 용서만큼 어려웠다.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용서’의 연관어 검색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는 ‘화해’, ‘치유’였다. 날 실망시킨 나와 화해하지 않으면, 치유할 수 없고, 수용은 사실상 죽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찌질한 날 죽이고 극적으로 부활할 자신이 없으니 멋쩍지만, 이제 셀프사면을 단행한다. 용서가 수용이고, 수용보다 용서가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는 느낌이다.

교만했던 나, 이기적이었던 나, 근자감에 쩔어 있던 나, 자기중심적이었던 나… 떠오르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용서하자. 그리고 용서를 빌자. 그리고 내가 용서 못한 사람들도 용서하자. 천천히, 하지만 온전하게.

용~서, 용서는 힘들어. 겸손보다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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