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구의 낙엽

by 정썰

서초 11번 버스에서 내려

남부터미널 직행에 몸을 싣고

한 시간 반,

여기

가을까지 오셨군요.


그곳은

대학 새내기 시절 기숙사가 있던 곳,

일 년 정도 살았으니

길에서 한 두 번쯤 마주쳤을 법도 한데

가물거리는 기억에, 그냥

잘 익은 벼처럼,

빳빳한 오만 원권처럼

윤기 나는 노란색을 상상했었죠.


뜨겁던 계절을 견뎌내고

지치고 푸석해져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돼버린

당신을

그만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뾰족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계절을 만나

아찔한 추락을 겪고 온 당신 앞에

이 근본 없는 편견은

이 나이가 되도록 지지 않으니

창피하고 미안하기만 합니다.


사라짐으로 존재하는 당신,

떨어짐으로 새로워진 당신 덕에

'있다'에 집착하지 않고, '없다'에 슬퍼하지 않는**

가을을 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먼 길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광균, 추일서정(秋日抒情) 중

** '초역 부처의 말' (p.76, 경집 950)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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