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다시 22화

#어른

#어쩌다 #어른이 #어린 왕자 #피터팬 #벤자민_버튼

by 정썰

'쟈는 애가 아닌 거라' 봉천동 이 층집 한편의 반지하 원룸(이라 쓰고 셋방이라 읽는다)에 살던 시절, 주인집 할머니는 엄마한테 날 지목해 그렇게 말했다. 좋은 의미였다. 나쁜 의미였으면 내 귀에 들리게 그런 말을 했을 리 없고, 한 살인가 어렸던 손녀와 놀라시며 간식을 챙겨주시진 않았을 거다. '애어른'이라는 소릴 듣고 자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슬픈 흑역사지만, 당시엔 또래 아이들보다 우월하다는 칭찬 같고 좋았다.


난 진짜 철이 일찍 든 아이였을까? 철이 든다는 의미는 뭘까? 사전적 의미로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라니, 이런 정의에 따르면 난 일찍 철이 든 것이 맞다. 사리는 모르겠고, 가난하다는 상황을 분별하여 알아서 하는 힘이 일찍 생긴 거다.





EPISODE 1.

아이는 친구네 집 마당, 작은 정원에서 빨랫줄을 타고 놀고 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유격줄타기 놀이 정도. 친구가 몸을 밀면서 줄을 놓쳐 떨어진 아이는 바위에 머리를 찧었다. 간질거렸다. 그리고 끈적거렸다. 피. 당황한 소년은 손가락으로 상처부위를 꾹 누르고 집 수돗가로 가서 피를 씻어내고 있었다. 엄마께 혼나는 두려움이 아닌, 병원에 대한 두려움. 의사 선생님과 치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병원비에 대한 두려움. 엄마가 임시방편으로 막아낸 작은 구멍은 가마처럼 남았다.




EPISODE 2.

중3 소년은 학생주임 선생님으로부터 학생회장 제안을 받았다. 선거가 아닌 임명제 학생회장.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교무실 앞 복도에서 선생님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고, 그 옆에 섰던 소년은 단호하게 거절의사를 밝혔다. 소년의 거절 이유를 들은 선생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후문에 그날 교무실은 각성과 탄식의 도가니탕이었다고 한다. 선생님들의 만장일치로 소년은 전교학생회장이 되었다.

'선생님, 집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부모님께서 식사 대접이나 행사 후원을 못 해 드릴 거 같습니다.' 당돌함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 벤자민 버튼. 그의 정신은 세월을 따라 온전히 흘렀지만, 몸의 시간은 거꾸로였다. 난 반대였다. 아이의 몸은 시간을 따라 남들과 비슷하게 늙어갔지만, 정신은 역행하는 듯했다. 어릴 적 어른 흉내를 내며 떨던 점잖은 다시 보니 위선 같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양보하거나 포기했던 것들은 뒤늣은 욕심으로 차올랐다. 어릴 적 결핍의 시간들은 골다공증처럼 삶의 뼈대를 약하게 만들었고, 현실은 커다란 구멍을 메꾸기에는 늘 부족했고, 난 자잘한 구멍들을 메꿔가며 계속 어려져 가고 있었다. 어른이 되는 게 부담스러웠고, 어른으로 살아가는 게 두려웠다. 조숙한 거 같았지만 그냥 어른 흉내를 내는 거였고, 막상 어른이 되는 건 쉽지 않았다. 말 그래도 어쩌다 어른이었다. 내 한 몸 추스르는 게 버겁다고 느끼던 어느 날, 바닷속으로 커다란 배가 가라앉았다. 어른들이 만들고, 어른들이 조종하고, 어른들이 도망 나왔고, 어른들 말만 듣고 있던 아이들이 어른보다 먼저 어른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져 갔다. 미안하고 부끄러운 건 내가 그 어른이라는 거,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어른이라는 거, 아무것도 해오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할 계획도 없는, 그냥 이기적인 어쩌다 어른이었다는 거. 그날부터 진짜 어른으로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주름은 늘고, 병증만 심해진 난, 계속 거꾸로 자라고 있었다. 불혹의 나이도 늘 혹했고, 이제 지천명. 스무 살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서른 살에 벌지 못했던 부끄러운 월급을 받아보고, 겪지 않아도 될 거 같은 일들을 겪어가며 이제야 사춘기를 막 지난 느낌. 다시 어른이 되고 싶다. 아직도 장난감을 모으고, 개그 프로를 보면서 깔깔거리고, 가끔 유치한 장난과 농담을 하지만, 공정과 상식, 긍휼과 염치를 아는 어른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반말하지 않고, 뻔뻔하게 차도를 가로지르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매너를 지키는 어른으로. 지킬 건 지키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포기할 건 포기하는 어른으로. 어른이 너무 많지만 어른이 없는 이 시대에 어른으로 살아보자. 어렵겠지만.


p.s. ‘어른’의 어원은 ‘얼우다’(남녀가 교합하다. 성교하다, 혼인하다)의 어간 ‘얼우’에 사람을 나타내는 불완전 명사 ‘이’가 붙어서 ‘얼운이’가 된 것.

keyword
이전 21화#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