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청년장교 #Youth
靑春, 사무엘 울만
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 is a state of mind; it is not a matter of rosy cheeks, red lips and supple knees;
it is a matter of the will, a quality of the imagination, a vigor of the emotions; it is the freshness of the deep springs of life.
Youth means a temperamental predominance of courage over timidity of the appetite, for adventure over the love of ease.
This often exists in a man of sixty more than a body of twenty.
Nobody grows old merely by a number of years.
We grow old by deserting our ideals.
Years may wrinkle the skin, but to give up enthusiasm wrinkles the soul.
Worry, fear, self-distrust bows the heart and turns the spirit back to dust.
Whether sixty or sixteen, there is in every human being's heart the lure of wonder, the unfailing child-like appetite of what's next, and the joy of the game of living.
In the center of your heart and my heart there is a wireless station;
so long as it receives messages of beauty, hope, cheer, courage and power from men and from the Infinite, so long are you young.
When the aerials are down, and your spirit is covered with snows of cynicism and the ice of pessimism, then you are grown old, even at twenty,
but as long as your aerials are up, to catch the waves of optimism, there is hope you may die young at eighty.
( 봤지? 나 3개 국어 썼다.ㅋ)
청년경찰, 청년다방, 청년피자, 청년고기장수, 청년방앗간으로 이어지는 청년 시리즈, 그리고 총각네 야채가게, 총각네 붕어빵까지. 청년, 총각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으면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천방지축, 뭔가 서툴고,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한.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하고, 무모하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기성세대의 압박에 굴하지 않으며, 패기와 열정으로 마침내 정의를 지켜내는 젊음. 그래서 청년경찰이라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결말을 알 거 같았고, 커피도 피자도 고기도 참기름도 믿고 마시고 먹을 수 있을 거 같다. 채소는 늘 싱싱하고 저렴할 거 같고, 붕어빵은 살아서 펄떡펄떡 뛸 거 같다.(아 이건 너무 나갔나?) 내게 청년은 총각은 그런 의미다. 그래서 ‘청년장교’로 평생을 살고 싶었다. 두 번의 보직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맺은 선배와 난, ‘청년장교’ 정신으로 군을 변화시키자고 의기투합했었다. 아직 현역인 선배는 지금 어떨까? 난, 빨리 늙어버린 군과 선배 장교들을 속으로 씹으면서, 때론 반항하고, 때론 침묵으로 시위하고, 때론 입바른 소리로 대들다가 그들처럼 늙어갔다. 그리고 생물학적 청년기의 끝자락에서 ‘장교’라는 두 글자를 떼어 버렸다. ‘영원한 청년장교’의 꿈은 허무하게 끝이 났지만, ‘청년’만은 붙잡고 살려고 노력했다. 정기적으로 공을 차고, 천변을 달리고, 산에 올랐다. 정신이 녹슬지 않도록 꿈꾸고, 상상하고, 공부했다. 청년이고 싶었다.
현실의 문턱에 걸려 넘어졌을 때, 더 이상 청년일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았고, 새로운 시도를 번번이 막아섰다. 뒷방 늙은이가 된 느낌. 갑자기 팍 늙어버렸다. 삶에 대한 열정은 체온과 함께 식었고, 맘이 먼저 병들고, 곧 따라서 몸도 병들기 시작했다. 청년의 정년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중학생 때 즐겨 읽던 사무엘 울만의 ‘청춘’을 다시 옮겨 본다. 영어실력이 보잘것없어 번역으로 옮기기도 어렵고, 번역본은 뭔가 본의를 전달하기 부족한 듯하여 영문을 옮기고 떠듬떠듬 다시 읽어본다. ‘마음의 상태’, ‘이상의 상실’, ‘영혼의 주름’, ‘냉소주의’, ‘비관주의’. 지난 몇 년간 내 존재를 지배했던 단어들.
아침에 단지 내 체육관에서 트레드밀 위로 달리며 무음으로 시청한 프로그램에 ‘청년 방앗간’ 젊은 사장님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부럽고 부끄러웠다. 다시 청춘이다.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보내지 않을 거다. 달 밝은 밤, 창가에서 구슬프게 연가를 부르지 않을 거다. 잠수 타는 동안 심연에 함께 가라앉은 아름다움, 희망, 응원, 용기의 말들을 다시 끄집어 올리는 중이다. 공정하지 못하고, 상식적이지 못한 세상에 (소극적으로라도) 맞서, 청춘으로 살다가 청춘으로 눈을 감고 싶다.(80보다 좀 더 살고 싶다.) 내 가슴 한편엔 아직도 회식자리 장군 앞에서 떨지 않고 당당하게 돌려까던, 시퍼렇게 날이 서있던, 혹은 세상물정 모르고 철없던 특전사 대위의 기백이, 그 미세한 떨림이 남아있다. My areials are up, to catch the waves of optimism.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