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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Dec 27. 2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카페에 들렀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지만 그 바램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만의 장소가 아니니 어쩔 수 없겠지만 주위가 온통 대화중인 사람들이었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거나 영화를 틀어도 웅성거림이 저 깊은 곳에 깔려있었다. 어차피 집중도 안 되는 거 사람 구경이나 하자며 옆자리서부터 찬찬히 한 사람씩 무얼 하나 보았다. 꼭 한 사람씩 눈에 띄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이번에 눈에 들어온 사람은 그 웅성거림 속에서 공부를 하는 여자분이셨다. 까만 단발머리에 손톱을 까맣게 칠하고 4색 볼펜으로 열심히 줄을 긋고 연습장에 무언가를 적는 그녀가 참 예뻐 보였다. 어쩌면 집중한 그 모습 자체가 부러웠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맨 구석자리에 앉은 내 자리서부터 스무 개는 족히 될 법한 테이블에 남자 손님이 없다. 한두 명쯤 노트북을 들고 있을 법 한데. 여자분들의 수다 삼매경에 놀라 도망이라도 간 걸까. 어쨌거나 결국엔 나도 짐을 싸고 말았다. 웅성거림을 피하느라 이어폰의 볼륨을 너무 높여서인지 귀가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집에서는 작업이 잘 안되라는 건 핑계인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카페에서도 작업은 잘 안되었으니. 고요하고 화장실도 물건이 없어질 염려 없이 들락거릴 수 있고 혼잣말도 가능하며 피곤하면 심지어 누울 수도 있다. 나태해질 걱정이 있긴 하지만 최고의 작업실임에는 틀림없다. '집에서는 영 집중이 안 돼'는 핑계이다. 분명 그렇다.

노트북은 타자가 조금씩 밀리는 느낌이었다. 좋은 타자기가, 아 그 왜, 그 기계식 키보드인가? 그게 있으면 더 잘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좋아하는 블로거가, 아주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블로거가, 글도 많이 쓰고 심지어 책도 낸 블로거가 넷북을 썼던 게 기억이 나서 그것 역시 핑계임을 알았다. 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하는 걸 보고 말았으니 물건 핑계도 그만 두기로 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핑계를 만들었다. 신나게 시작했던 올해는 바람과 함께 지나가서는 이제 4일 정도가 남아버렸다. 내년부터라고 하자니 뭔가 치사한 것 같아 오늘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마음에 담아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 탓 물건 탓 사람 탓 그런 거 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보자고. 나한테 미안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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