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by 이현주

2017년 5월


꽃들이 기지개를 켜고 하루를 시작하면 벌레들이 분주히 날아드는 날들이 이어져 갔다.


어느 날 소리 없이 막둥이가 장남과 함께 왔다. 담벼락을 따라 주욱 심어 놓은 붉은 장미들이 손짓하며 반겼다. 막둥이는 내려온 후로 테이블에 앉아 햇빛을 쬐거나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한날은 일순 씨가 부탁해서 씻겨 드리는 거 같았다. 귀찮았는지 화장실 안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때가 되면 식사도 준비했다. 하지만 할 일이 끝나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순 씨는 요즘 들어 부쩍 기운도 없고 가죽만 남아 겨우 가뿐 숨만 내쉬고 있다. 방 안에서 자는 시간이 늘었고 그녀의 발바닥은 더 이상 흙투성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손녀가 좋아 간간히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이따금씩 잘 익어 곧 땅으로 떨어질 거 같은 앵두를 한 뭉텅이 따서 내밀었다. 막둥이는 씨가 커다랗고 과육이라곤 입에 머물자마자 사라지는 앵두가 별로였다. 한 입 먹고는 나머지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장남은 늘 그렇듯 집안 여기저기에 망가진 것들을 고치고 잡초들을 뽑느라 바빴다. 나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어질 때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낮이 무척 길어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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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첫째 아들과 손녀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일순 씨는 심한 통증이 오는 배를 부여잡았다. 그녀는 서울보다는 가까운 곳에 있는 셋째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부리나케 달려왔고 일순 씨를 싣고 가버렸다. 나와 집 도깨비들은 걱정이 되어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에게 약손 처방을 해주고 싶었지만 한낱 물건인 우리들이 무얼 해줄 수 있을까.


7월

조용하던 집이 북적거리기 시작한 건 일순 씨가 서울 장남 집과 병원에 있다가 왔을 때다. 그동안 그녀는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지 지친 기색이 짙었다. 일순 씨는 나보다 더 오래 살았지. 나도 곧 그 나이가 될 거다. 그럼 일순 씨가 무척 그리울 거 같다. 정말 다행인 건 내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따뜻한 품을 내줄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8월 다시 병원

그녀의 몸 상태는 더욱 나빠졌고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병원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곳곳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과 일가친지들이 모두 일순 씨를 보기 위해 왔다. 인사를 마친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9월 29일 저녁 9시 소풍

일순 씨는 결혼하고 74년 동안 여기를 떠난 적이 없다. 2017년 추석을 앞둔 맑은 날 그녀는 가마가 아닌 자식의 차를 타고 나에게로 돌아왔다. 장남의 손에 들린 사진에는 일순 씨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그 모습이 낯설었다. 까막눈 일순 씨의 전용 라디오였던 참새들이 지저귀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내 곁을 빙 둘러 안방과 주방 화장실 마당 장독대가 있는 뜰과 텃밭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녀는 긴 소풍을 떠났다. 모두가 떠나고 어느 밤 보름달이 영롱 한 빛을 내며 지붕 위로 떠올랐다. 마당으로 드리우는 내 그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녀의 나지막한 숨소리가 그리웠다.


11월

겨울비가 내린다.

비가 오면 부엌에서는 부침개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새들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조용하다.

이번 겨울은 무척 길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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