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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Jan 09. 2021

가능하긴 할까? 오차 없이 공평한 결혼생활

할 수만 있다면, 해보는 거지.


결혼 후 우리는 가사노동을 적절히 나눠서 해왔다. 분리수거와 화장실 청소 빨래는 남편주방일은 내가 하는 것으로 하고 청소는 퇴근이 이르거나 상황이 되는 사람이 했다.

어른 둘이 살고 크게 치울 것도 없던 시절,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 저녁도 각자 회사에서 해결할 때가 많은 데다 빨래는 주말에 몰아서 했으므로 대체로 평화롭고 공평한 가사노동과 결혼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문제의 시작은 출산에 있었다. 사람이 한 명 늘어난다는 건(그것도 아기)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이 살 때와 다르게 가사노동의 양이 폭발적으로 가했다. 어디서부터가 가사 노동이고 어디까지가 육아인지 경계도 모호했다.


이트와 우드의 조합, 그린으로 포인트를 줬던 집은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베이비룸과 범퍼침대 그리고 이제는 이름도 잘 생각이 안나는 국민 문짝(이 거대한 물건들이 우리 집이라는 한 공간에 다 있었다!) 같은 것들에 떠밀려 산으로 가 있었다.  육아에 서툰 내가 순서 없이 아기를 돌보며 어질렀거나 막 활동성을 갖기 시작한 아기의 소행이 든 간에 대부분의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다.


그 엉망인 집안엔 유일하게 노동력을 지닌 어른하루 종일 기거했는데 그게 나였다. 렇다면 남편이 퇴근하기 전까지 해야 하는 노동은 모두 다 나의 몫인 건가? 처음 접한 육아만으로도 이미 혼이 나갈 정도였는데 사이사이에 청소와 빨래 같은 집안일도 해내야하다니. 아기를 업은 채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려야 겨우 커피 한잔하고 책 한 장 볼 시간이 났다. 하루 종일 밥 한 끼 편히 먹지 못했는데 해가 지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퇴근이 이르지 않은 탓에 저녁 준비에도 책임을 느껴야 했다. 초반엔 감당이 안돼 사 먹거나 시켜먹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통장잔고를 보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더 이상 맞벌이가 아닌 우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외식을 하면 남는 게 있을 리가! 결국 시간을 쪼개 반찬까지 만 되었다.


남편도 나름대로 퇴근 후 설거지를 하고 아 목욕을 시키고 분리수거를 하며 노력했지만 거대하게 커진 집안일, 내일이면 바로 업데이트되는 똑같은 청소, 빨래, 삼시 세 끼를 생각하면 지나가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고요했던 집에 갑자기 쌓인  격정의 집안일과 좌충우돌 육아를 견디며 나는 가끔 울고 싶어 졌다. 물론 그때마다 엉엉 울었다. 내 삶인데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결혼을 했고 이어서 출산을 했다. 내게 결혼이란 제도가 잘 맞을지, 대한민국서 유부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또 어떨지에 대해서.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해선 막연히 생각만 했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왜 비혼과 결혼을 고민하지 않았을까, 왜 아이 없이 사는 삶은 논외였을까. 휴학 한번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란에 쓸 말이 없는 상태를 두려워하며 직장을 가졌던 것처럼 나는 결혼과 출산에도 너무 성실하고 말았다.


서른이 되어서야 들여다본 나란 사람은 의외로 성취욕이 강하고 성과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든 '같이'하는 것이든 그런 단어 따위가 갖는 의미고 뭐고 모르겠고 나는 당장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그때 내게 가장 필요했던 건 워킹맘을 위한 견고하고 믿음직한 사회적 제도였다. 당시 나는 작은 회사를 다녔던 터라 그나마 있는 제도들도 활용하기 어려웠다. 결국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아 6개월 만에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고 해서  삶의 질이 나아진 건 전혀 아니었다. 퇴근을 하고 다시 집으로 출근했다. 아이와 놀아주고, 간식을 만들고 집안일을 하느라 몸은 훨씬 더 고됐지만, 그렇게 사는 내 모습이 좋았다. 근하면서 맞는 아침은 쾌했고, 퇴근할 때는 보람찼으며 아이를 안고 잠드는 하루는 뿌듯했다. 출산 직후 찾아온 나의 불행은 지나친 가사노동이나 육아의 어려움보다 집에 갇혀있었던 답답함에서 비롯됐던 것이 분명했다. 


원인을 알고 다시 행복한 ''로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친정엄마에게 내 일을 떠넘겼다는 죄책감과 미안함, '이런 내가 과연 아이에게 좋은 엄마일까'하는 고민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어쩌다 친정엄마가 남편의 와이셔츠라도 다려놓는 날엔 날카로운 화살 남편에게 쐈다. 적어도 남편은 이런 고민은 안 하고 살 테니까.


장모님이 애기 봐주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래. 알아?



시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셨다면 공평한 결혼생활이라 여겼을까? 큰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둘째를 낳으면서 또 한 번 세상을 향한 생각과 시야가 바뀌었다. 둘째를 낳은 뒤 엄마로부터 정서적 독립이란 목표 아래 아이 둘을 직접 키우고 있는데 한번 해본 육아는 훨씬 수월했다. (업그레이드된 육아템, 식세기와 최첨단 청소기에 감사인사를)


혼자만 고생한다 생각했던 출산과 육아의 시간도 멀리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10년을 살다 보니 남편 내가 날을 세울 상이 아니. 나의 공백을 채워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며 유일하게 나와 모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상대였다. 연결된 삶으로 인해 서로의 행복을 순도 100%로 축하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10년을 사는 동안 나는 남편에게 정서적으로 많은 것을 빚졌다. 남편과 함께하는 삶은 오늘의 공평함을 기준으로 삼을만한 단편적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와 나의 삶은 곧 서로의 인생 전체였다. 때로는 내가 인생의 한 부분을 희생하고, 언젠간 남편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예측할 수 없었던 지난 10년의 결혼생활에서 우리는 수없이 시소를 타며 기울었다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우리 결혼생활이 '오차 없이 공평해야'한다면 그 기준이 시시한 집안일이나 효도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공평한 결혼생활, 그게 가능하다면, 할 수 있다면 꼭 해보고 싶다. 내가 행복한만큼 남편도 오차 없이 공평하게 행복하길. 그 기준이 우리의 행복인 그런 생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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