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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Mar 21. 2021

결혼하면 매일 함께랬잖아

힘들 때도 우린 함께였을까



결혼이 제일 실감 나고 짜릿했던 순간은 심야영화를 보고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꼬치 같은 야식을 먹은 뒤 새벽남편과 같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이상하고 재밌었다. 그때 불과 10분 거리에 살고 있는 아빠가 막 결혼한 나를 두고 '우리 딸이 집에 오고 싶을 텐데'라며 그리워하셨다는데 그런 아빠에게 너무 죄송할 만큼 신혼생활은 신났다.


그땐 매일 함께, 기쁜 일도 힘든 일도 함께, 그럴 줄 알았. 첫 아이를 낳은 뒤 산후조리를 하려고 누워있는 내 옆에 나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남편이 대상포진으로 몸져누울 줄 정말 몰랐다. 아니, 애는 내가 낳았는데 자기가 왜....? 도대체 왜?!  것도 힘들어하던 남편은 산후조리하던 나를 두고 혼자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하긴 남편도 새 가족이 생긴 일생일대의 출산이란 이벤트를 두고 엄청난 역할을 다. 당시 우리는 그 시절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가족분만과 더불어 르봐이예분만을 선택했었다. 병원에서 태아에게 좋다고 추천해줬던 르봐이예분만은 아파 죽을 것 같은 내 귀에 클래식을 때려 박아주는 우아한 분만이었다. 그뿐인가, '아버님! 오일 바르실게요~'라는 간호사의 말에 남편은 클래식에 맞춰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내 배를 양손 스킬로 열심히 문질러줬다. 을 것 같았던 내 눈엔 모든 게 다 우습고 짜증 날 뿐이었지만, 아기한테 좋은 거라니 별 수 있나. 클래식이 흐르는 분만실에서 아기 맞을 준비 집중했다.



 본격적으로 출산이 시작되었을 때(드디어 아기 머리 보여요!) 비로소 우리 남편이 눈부신 역할을 해줬다. 나는 그러니까 힘을 더럽게 못줘서 의사한테 혼나는 산모였는데 그게 꼭 내 탓만도 아닌 것이 의사가 지금 힘주세요! 하면 간호사가 산모님 힘!!이라고 했고 남편이 그 말을 받아 귓전에서 자기야 힘주래 힘!! 하며 내 상체를 힘껏 들어 올려 주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 써라운드 스테레오 힘주기 푸시를 들으며 도무지 어느 타임에 힘을 줘야 할지, 언제까지 힘을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고통의 출산. 그 와중에도 '걱정 마 선생님이 안 아프게 해 주신대!! 다 끝났어 다!!'라고 만실이 떠나가라 외쳐줬던 남편 덕분에 안 아프게 할 생각이 조금도 없던 의사와 모든 건 산모님에게 달렸다던 간호사, 고통의 끝을 맛보고 있던 나까지 다 같이 웃으면서 첫 아이를 안을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실감 안 나던 부모 1일 차. 숨 돌린 줄 알았던 나는  훗배앓이에 시달렸다.(엄마 이거 뭐야, 낳았는데 왜 아직도 아파?!!) 간호사는 내 배를 문질러주라는 지시를 남편에게 내렸고, 이미 가족분만으로 어깨가 딱딱해진 남편은 촉진제라는 약물투여 전까지 열심히 배 마사지를 해야 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둘이 누웠던 그 밤, 몸이 지칠 대로 지친 우리였지만 이상하게 잠들 수 없었다. 실체도 없는 거대한 책임감에 겁이 났고, 행복의 한가운데 둥실둥실 떠다니는 느낌에 얼떨떨했던 신기한 날이었다. 서로 번갈아가며 '자? 잠이 안 와. 믿어져' 같은 말들을 나누다 날이 새고 말았다. 다음날 들이닥쳤던 축하사절단을 응대하고 배웅하는 일까지 하느라 남편은  바빴다. 본인 몸의 이상 변화를 감지했지만 막 출산한 내 앞에서 아프단 을 못 해 병을 키우다 대상포진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말았던 것이다.



남편도 나도 누워있던 그때, 설상가상으로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된 아기지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일이 생겼다. 신생아의 입원은 자체가 무서운 일이었다. 병명을 알기까지 수차례 작은 몸에 찌르는 주삿바늘을 지켜봐야 했고, 다행히 유행성 질병이라는 결과를 안 후에도 나는 산후조리 대신 아기랑 병원 침대를 나눠 쓰며 간호로 그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언제나 함께하려고 결혼했는데,  행복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아기를 낳았는데, 상도 못했던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제야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소꿉놀이 같던 신혼시절은 이제 지나갔구나. 트레스를 주는 게 겨우 직장상사였던 시절을 지나 인생이 복잡한 시기로 진입구나. 이 시기를 헤쳐나가는 게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생각까지 들자 갑자기 외로워졌다. 는 그렇게 서른이 되었고, 호된 신고식을 치르며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엄마가 되었다.




쓰나미와 같았던 첫아이 출산 뒤 복직을 하며 아이는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외동 확정!(남편 의견 반사다 반사!)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나날이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는 말도 안 되게 귀여웠다. 인간이 이렇게 귀엽고 예뻐도 되는 걸까? 나는 뭐에 씐 것처럼 갑자기 둘째가 절실해졌고, 그런 마음이 들자마자 더 늙기 전에 애를 낳아야겠다고 호들갑을 떨어 임신을 했다. 계획한 대로 실천만 잘하면 이룰 수 있었던 그 전의 인생과 다르게 혼 후엔 각도 못한 변수들이 종종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그때도 그랬다. 두 번째 임신은 유산으로 끝났다. 아기 심장소리도 들었는데, 주수에 맞춰서 잘 크고 있었는데, 입덧도 심했는데 믿을 수 없었다.



기 힘든 괴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때에도 남편은 수술을 지켜본 뒤 나를 바로 친정에 데려다주고 해외 출장길에 올라야 했다. 쓰고 보니 너무 냉정해 보이지만, 둘 다 직장인이었고 유산은 갑작스러웠던 탓에 수술할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하기 쉽지 않았다. 제법 더웠던 늦은  우리는 병원으로 향했다. 옷장 구석에서 꺼내온 구스 재킷을 덮어주고 엉뜨를 틀어주며 '어디서 봤는데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대'라고 말하던 남편은 측은 동시에 든든했다. 술이 끝난 후 눈을 떴을 때 편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너만 있으면 돼. 둘째는 낳지 말자.' 똑같이 아를 잃고 그 슬픔을 서로 보듬을 새도 없이 그때 우린 사는 게 참 치열했다. 자 남아 미역국을 퍼먹으며 내가 느꼈던 상실감의 크기는 어마어마했지만 남편이 옆에 있었다고 한들 그 슬픔을 피해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늘 남편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그가 숱하게 다닌 출장길. 말도 안 통하는 중동에서 비행기를 놓쳐 막막했을 때나 여행 위험지역 국가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했을 때, 갑상선에 모양이 이상한 혹들이 있다며 무서운 말을 잔뜩 들은 뒤 조직검사를 하고 와서 누워있던 밤, 같잖은 직장상사에게 마음을 할퀸 채 돌아왔는데 출근하고 싶다고 우울해있 와이프를 마주했을 때 남편도 좀 외롭지 않았을까. 사실, 말없는 남편의 마음속 저 깊은 곳의 외로움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혼자 살았다면 삶이 훨씬 더 가볍고 간단했을 텐데, 그럼에도 굳이 같이 살 생기는 문제들을 감는 이유가 뭘까.

나는 몇 년 전 세 번째 임신을 하고 입원했던 날을 떠올린다.(또! 임신과 출산인가. 딩크가 많은 이유를 알만하다 정말) 유산 뒤에 한 임신은 꽤 안정적인 편이었는데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갑작스러운 임신 중기 출혈로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는 부부들 사이에서 아이를 잃을까 두려워하던 남편과 내가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입원기간 동안 남편은 계속 병원에서 출퇴근했다.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하는 나를 배려해 매일 물 두병, 내가 좋아하는 과일과 과자를 손 닿는 곳에 놓아주고 근했다가 해가 지면 병실로 돌아왔다. 출산 축하기도와 방문객이 줄을 잇는 축제 분위기의 산부인과 입원실에서 떨어져 있는 큰 아이가 보고 싶고, 배 속에 아가 어떻게 될까 무서워 혼자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남편이 곧 퇴근해서 오니까 견딜만했다.



의사 선생님은 출혈이 심해지거나 출산징후가 오면 대학병원으로 가서 겨우 몇백 그람밖에 안 되는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고 두려운 말들을 늘어놓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잔뜩 움츠러드는 나와 달리 남편은 겨우 세수만 하고 휠체어에 앉아있는 내 사진을 찍으며 낄낄 웃었다. 뭐 하는 거냐 물으면 '이런 사진을 언제 찍겠어!'라면서.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생각, 나라면 안 했을 행동들을 하는 남자와 사는 일은 생각도 못한 상황에서 묘한 위로가 되었다. 그날 휠체어 사진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같이 웃었고, 다행히 퇴원도 할 수 있었다.


곁에서 손을 잡아주지 못해도, 눈을 마주치고 한 줌의 위로를 건넬 수 없을 만큼 때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주는 영향력은 삶의 방향을 바꿀 만큼 컸다. 사는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걱정거리들이 끝내 내 삶에서 멀어질 수 없다 해도 둘이라면, 둘이라서, 그리고 넷이라서 나는 이전의 나보다 용감하고 씩씩해졌다. 아! 어쩐지, 아줌마들이 다 그렇더라니. 렇게 나이 들어 가는 게 기쁘고, 한편으론 조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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