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은 Jan 17. 2021

내가 아는 가장 부지런하고 성실한 남자

그래서, 언제까지 성실할 거니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매일 새벽 다섯 시 반만 되면 욕조의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진다. 조용한 새벽 공기를 와장창 깨는 콸콸 소리가 벌써 네 달째다.


개띠라 그런가? 남편은 수영도 목욕도 좋아한다. 코로나로 취미활동을 못하게 되자 그는 신욕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었다. 남편은 집안의 구성원이 아무도 활동하지 않는 그 시간에 욕조 안에 들어앉아 책을 읽는다. 내용이야 뻔하지, '부자가 되는 법'같은 내용을 가지고 제목을 현란하게 바꾼 여러 책들. 언제나 상위 챕터에 반드시 있는 일찍 일어나는 부자들, 새벽시간을 잘 활용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겠지.


남편의 부지런한 생활습관을 존중한다. 그는 좀처럼 일을 미루는 이 없다. 왜 그러면 안되는지 정말 모르겠는데 조금만 앉아있다가도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하고 몸을 움직인다. 그는 해외출장 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집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여행가방을 푸는 남자다. 입었던 옷을 세탁기에 모두 집어넣고 빨래를 돌리고 캐리어를 제자리에 갖다 놓은 뒤 샤워를 하고 수영을 가는 남자. 이 모습을 처음 보고 나는 거의 경외심에 가까운 정을 느꼈다. 여행가방이건 출장가방이건 그거 원래 한바탕 자고 밥 한 끼는 먹고 푸는 거 아니었나. 둘째 산후조리기간에 남편의 모습을 본 도우미이모님은 남편이 저렇게 할 일을 잘하니 새댁은 걱정이 없겠다고 했다.(네, 전 제가 걱정이지요)


부지런하고, 성실한 남자여서 그 모습이 좋아 결혼까지 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닌데 살면 살수록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요즘은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안타까울 정도다.


나는 가능하면 7시간 이상의 수면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미니멀 6시간. 어쩌다 4시간밖에 못 자는 날엔 몸이 피곤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걱정을 하고 안달이 난다. 절박하게 짧은 기도를 하기도 한다. 둘째가 제발 내일 여덟 시까지 자게 해 주세요!(참고로 나는 무교다)

40년 가까이 살면서 터득한 최상의 컨디션을 위한 최소한의 일들 중 하나다.  이것을 지켜야 타인에게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고, 일을 하면서 졸지 않을 수 있으며, 사소한 일에 화가 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남편은 다섯 시간만 자도, 아니 한숨도 못 잔다 해도 사소한 일에 짜증을 내거나 타인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편은 아니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럴 리가. 남편도 이제 마흔이다. 몸을 막 써도 되는 나이는 지났다.


엄마! 아빠가 같이 게임하다 자.

아빠 또 코 골아!

이런 말들은 충고를 거부한 남편의 결과다.


가끔 남편이 의심스럽기도 하다.

설마, 회사에서 자는 것인가?


20대에 봤던 김 부장처럼, 박 팀장처럼 그도 회사에서 코를 골며 자다가 그 소리에 놀라 깨지는 않는지 한 번씩 걱정이 된다. (그때 나는 대체로 그들을 한심하게 여겼었다)


주말엔 새벽부터 일어나서 동네를 한 시간 반씩  걷고 들어와 반신욕을 시작한다. 애들이 일어나마자 아빠를 찾는데 들아 아빠가 어디 있겠니, 당연히 욕조 안이다.

그는 매일매일 만보를 채우고 만보씩 걷는 날도 많다. 매주 도서관에 가서 경제 관련 서적 자기 계발서를 대출해 꼬박꼬박 읽는다. 공부한 것들을 바탕으로 재테크에도 힘을 쏟는다. 약속된 출근시간보다 항상 일찍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다 좋은 습관이지만 매일 옆에서 지켜보면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눈이 따갑다고 하는 것도, 어깨가 아파서 잘 못 일어나는 일도 덜 쉬어서 생기는 몸 신호 같다.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전력을 해 뛰고 쓰러져있다가 숨을 좀 고른 뒤 또 전력질주를 하는 것 같다.


직업과 직장을, 집을 갖기 위해 우리의 20대와 30대는 치열했다. 40대가 가져야 하는 경제적 안정, 50대 가져서는 안 될 노후의 불안을 덜기 위해 늘이 행복해도 안주할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아이를 재우고도 불안으로 잠들지 못했다. 둘째까지 낳고 나니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나보다 어리고 두뇌회전도 빠른 젊은 친구들도 설 곳이 없다는데 내가 예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은 걱정이 되고 그 걱정은 암담한 미래가 되어 무서웠다.


어쩌다 들려오는 새로운 팀의 팀장 제안은 그렇다 치고 작은 단기 프로젝트까지 육아로 거절해야 할 때면 복잡한 마음이 됐다. 아직 내게 기회가 있어 감사한 동시에 이렇게 번번이 거절하면 다신 다음이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도 아이들의 웃음소리 안에서 불안을 떨쳤다. 지금은 육아를 할 수밖에 없는데 어쩌라고! 때가 되면 그때의 내가 잘하겠지 뭐, 설마 나 하나 일 할 자리 없겠어? 맞다. 나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남편은 여전히 종종 거린다. 어느 날은 유튜브 계정을 만들고, 어느 날은 분양권을 사자고 짓고 있는 아파트 앞에 나를 세워놓는다. 우리가 집을 또 살 돈이 있나? 내가 통장에 잔고를 가늠하고 있을 때 남편의 관심은 이미 스마트 스토어로 넘어가 있다. 그는 욕조안에서 백만장자가 되는 플랜을 기어코 세우고 말 것이다. 저 정도 집념이면 뭐라도 할 것만 같다.


다만 그전에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남편에게 번아웃이 찾아올까 걱정이 된다. 살아보니 진짜 무서운 일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목표가 전부라 여기는 삶의 태도였다. 그런 마음으론 쉽게 다치고 부서진다. 죽기 전까지 끝난 게 어디 끝난 건가. 사는 일에 완벽한 엔딩이 있냐는 말이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러기 위해선 속도를 줄이는 일이 필요하다. 나는 가끔 그의  새벽 알람을 몰래 꺼둔다. 그의 부지런함이 내게 자극을 주는 만큼, 푹 자고 일어난 개운함에 대해서도 남편이 알았으면 좋겠다.


조금 늦게 일어나도 그깟 책 한 권 덜 읽어도 우리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그래 왔듯 우리 둘의 적당한 균형으로 빠르고 늦지도 않게 너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당신이 원하는 인생, 내가 꿈꾸는 삶에 결국 갈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루지 못해도 좌절하지 않고 포기해도 비겁하다 여기지 않을 만큼 스스로와 서로를 향한 단단함이 있기에 미래도 노후도 나는 다 괜찮다. 우리 몸도 마음도 아프지만 말자.





이전 04화 가능하긴 할까? 오차 없이 공평한 결혼생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