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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Dec 27. 2020

나는 매일 다른 남자를 만난다

지겹지 않아요, 전혀


꽉 채워 5년 연애를 하고 6년 차에 접어든 나에게 친구들은 '지겹지도 않냐?'고 물었다. 결혼 소식을 알리자 축하다는 말들 속에서 '그렇게 오래 만나고 결혼하면 새로울 게 있겠냐'는 농담도 오갔다. 별말씀을. 스물셋부터 스물여덟까지 연애하면서 지겨울 틈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고 사회에 적응하느라 연애에 할애할 시간이 크지 않기도 했지만, 조금씩 역할을 확장하고 시야를 혀가던 우리는 더 이상 어제의 우리가 아니었다. 스물다섯 학생이었던 그와 서른의 직장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결혼은 상황을 좀 더 본격적으로 바꿔놓았다. 연애 5년 동안 싸울 만큼 싸우며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고 믿었지만 천만에!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막상 한 이불 덮고 자기 시작하면서 꺼번에 알게 되는 사실이 너무 많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래도 나보단 남편 쪽이 당황스러웠을 거라 추측해본다. 당황은 너무 가벼운 표현인가? 혹시 충격이었니?


딸 둘 시집보내고 수도세가 확 줄었다는 엄마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깨끗하게 구석구석 씻은 곳도 다시 보며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대략 한 시간쯤 흘러있었다. 이때쯤 데이트 약속에 매번 늦었던 이유를 남편은 납득했으려나. 새벽같이 일어나도 늘 출근시간이 타이트했던 이유도 이제 알만하지 않았나. 씻고 나와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액세서리 착용할 때마다 는 깔끔하고 단정하게 바뀌었지만 방구석의  상황은 정반대로 흘렀다. 방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실력 신혼집 전체로 확장다.


식당 테이블 위에 떨어트린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먹고, 화장실에 다녀온 손을 잡아도 기가 느껴지지 않아 위생관념이 의심스럽던 그는 의외로 정리정돈을 잘하는 깔끔한 남자였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수건을 세탁실에 갖다 놓고 화장대 위에 길게 늘어진 드라이기를 치우면서 그는 '흠'이라는 외마디 탄성을 남겼다.


내쪽에서도 놀라운 일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남편은 17살부터 하숙을 거쳐 결혼 전까지 10년 이상의 자취생활을 했다. 그가 살던 집에 가보면 냄비며 프라이팬, 밥솥 같은 조리도구가 구색을 추고 있기에 남편의 요리실력이 빼어나진 않더라도 먹고사는 게 가능할 정도는 되는 줄 알았다. 나도 퇴근 후 엄마가 차려주는 5첩 이상의 반찬을 받아먹기만 했는데 이걸 어쩐다? 둘 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라면이랑 계란 프라이뿐이었다. 게다가 남편은 요리에 대한 의지가 없었고 그가 끓여준 잡탕라면은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요리잡지 정기구독으로 가사분담 영역을 결정했다.


요리를 잘하게 된 나는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아니었고, 미니멀라이프라는 새바람을 만나 정리력을 한층 더 강화한 남편도 내가 알던 어제의 그 남자는 아니었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서로가 거의 남처럼 새로웠다. 퇴근하자마자 아이에게 얼굴을 갖다 대고 "하이고~ 우리 딸"을 찾았던 딸바보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자긴 경상도 남자라서 표현에 서툴다고 하지 않았나. 응?  

호르몬으로 감정이 널뛰고 처음 접해본 육아 강도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의 새로운 모습은 굳이 열거하지 않으련다. 어쨌든 연애와 결혼이래 새롭지 않은 날은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방송국 비상구 계단에서 찌질하게 울던 내가 작은 프로덕션에서 팀장을 거칠 만큼 둘 사이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사투리가 구성지던 공대생 해외거래처랑 유창하게 영어로 통화를 하는 인텔리한 남자가 되었다.  하자 많은 신혼집을 얻었던 흑역사를 뒤로하고 날마다 재테크 책을 끼고 사는 그는 누구일까. 부동산에 앉아 "여기 대장 아파트는 어디죠? 이 동네 임장 좀 다녀봤는데 호재는 별로 없잖아요?' 같은 말을 내뱉는 그가 나는 좀 귀여우면서도 낯설다. 남편도 내가 두 아이를 키우며 사나워(?) 지는 모습이 새롭겠지. 아니면 또 충격인가?


결혼 10년째, 이제는 지겨워질 만도 한데 남편의 흰머리가 자꾸 검은 머리의 비율을 넘보는 이 시점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많아지는 역할 덕분에 여전히 삶이 지루할 틈이 없다.


여기서 시간이 더 많이 흐른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편이 90이 되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가 쓰다 던져놓은 수건을 잡으며 '하, 내가 여기 또 수건있을 줄 알았지!'라고 한다거나 나를 생각해 삐걱거리는 무릎관절을 잡으며 물 한잔이라도 떠다 주는 날을 상상해보자면, 너무나 웃기고 눈물 나게 감동적이다. 이쯤 되면 지겹긴커녕,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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