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은 Dec 23. 2020

빨간머리앤을 좋아하는 그녀

덕분에 결혼이 쉬웠다.


얘 그거 엄청 길더라!
근데 나 다 봤잖아. 재밌어 하하!



그녀는 여전히 빨간머리앤을 좋아한다. 친정집 tv에 넷플릭스를 깔아두고 심심할때 보면된다고 작동법을 알려드렸더니 그 많은 콘텐츠 중에 귀신같이 빨간머리앤을 찾아서 보신 모양이다.


그녀, 그러니까 우리엄마가 얼마나 빨간머리앤을 좋아했냐면 동생과 내가 아주 어릴 때 ebs에서 하는 만화 빨간머리앤 방영시간에 맞춰서 하루도 빠짐없이 은색 동그란 밥상을 티비앞에 대령했었다. < 빨리 와 빨간머리앤 시작한다!!>는 외침과 동시에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마는 앤이 다이애나를 만날때나 초록머리가 되었을때 크게 웃었다. 월화수목금, 토요일까지 늘 일하느라 함께하지 못했던 아빠 없는 저녁을 그녀는 쾌활한 웃음소리 하나로 거뜬하게 채웠다. 내 유년시절의 bgm은 언제나 엄마의 웃음소리였다.





엄마 근데 무슨 생각으로 그때 외식을 다 했어?



자랄 때는 별생각 없이 지나간 나의 아주 어린 시절을 결혼하고 나서 종종 돌아보게 된다. 그때의 내가 아니라 그때 우리 엄마와 아빠를 생각한다. 두 분은 사랑에 제대로 불이 붙어서 20대 초반에 결혼했다. 하필이면 쌍꺼풀진 큰 눈을 좋아하는 엄마 앞에 키는 작지만 눈만은 부리부리한 게다가 코까지 오똑하고만 남자가 나타났다.

그때 우리 아빠의 눈이 얼마나 컸냐 하면은 할머니가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고 계셨는데 충청도 그 시골마을에 외국인이 지나간다며 미용실이 떠들썩하기에 할머니가 돌아봤더니 아빠가 걸어가고 있었단다. <아유~저거 우리 아들이여!> 엄마가 몇 번이나 말해줬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둘은 운명이었다. 엄마가 어찌 그 눈을 지나칠 수 있었을까. 돈 좀 있는 방앗간 집 셋째 딸은 가난한 시골마을 장남에게 시집가는 흔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자식과 함께하는 가난한 결혼생활은 덤이었다.




그러니까 돈도 없으면서 짜장면을 사 먹으러 갔어!! 기분 내려고~


엄마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웃는다. 사는 재미를 잊지 않고, 게으르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어릴 때부터 무료 전시가 열리는 미술관, 박물관에 다녔고 도시락 싸들고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산을 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엄마는 항상 웃었다. 가난은 결코 밝은 그녀를 가둘 수 없었다.

 
다행히 눈 크고 코가 오똑한 아빠가 대기업에 취직하면서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 그 시절의 엄마가 되어본다. 아빠의 삶도 짚어가 본다. 아빠의 퇴근시간은 늘 열한 시 열두 시였다. 젊고 가난했던 그들이 월급의 80프로를 저축하고 남은 돈을 가늠해보며 아이들과 같이 짜장면을 사 먹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던(우리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가 없는데 굳이!) 시절을 생각하면 고맙고 짠하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갑자기 바뀌어버린 환경과 버거운 현실에 괴로웠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든 삶을 려나갔겠지만 엄마처럼 웃고살진 못했을것이다. 부모님은 달랐다. 기억속에 두분은 한번도 싸운적이 없다. 어린 두분 앞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으로 마음에 여유가 없었을텐데, 기념일엔 장미를 사들고 오는 아빠 그런아빠를 철없게도 고맙게도 느꼈던 엄마는 놀랍게도 사랑으로(!) 시련을 극복했다. 환갑이 넘은 아빠가 엄마 좌석벨트를 대신 채워주다가 손을 다치셨다는 얘기나 아빠 곶감만들어준다고 감을 90개나 깎은 엄마 얘기는 그저 일상이다.


영원한 사랑이 환상처럼 느껴지는 결혼앞에서 내가 망설이지 않았던 이유는 두분 덕분었다. 에 독이될지 약이 될지 몰라도 내겐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키워드가 하나도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내향적이고 나서기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나는 밝게 자랐고 무엇보다 웃음소리만은 엄마를 닮았다. 




이전 01화 결혼 10년, 여전히 우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