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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Oct 04. 2023

이과남자의 위로법

그게 격려인가 싶긴 한데, 묘하게 위로가 되네?


1502호를 부동산에 내놨지만 생각보다 집은 새 주인을 빠르게 찾지 못했다. 우리는 급할 게  하나도 없어 시세보다 높은 금액으로 집을 내놓았고 대체로 집은 낮은 가격부터 상태가 좋은 순서대로 빠지기 때문에 우리 차례는 자꾸만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코로나는 생활 전면에 스며들며 '위드코로나'라는 새 국면을 맞았다. 이는 내가 드디어 가정보육에서 탈출해 초등학생인 아이와 미취학 아동인 둘째를 기관에 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2022년 3월, 드디어 둘째가 유치원에 들어갔다. 불과 한 달 전까진 상상도 못 했던 반나절의 자유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나는 가능하면 이 시간을 값지게 쓰고 싶은 마음에 가장 먼저 가까운 백화점 문화센터에 수필강좌를 등록하고 오랜만에 글을 썼다. 일주일에 단 하루, 거기 모인 네 명의 사람들과 글을 쓰는 일은 삶에 큰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그렇게 한 두 달의 시간이 쌓이자 내 안에서 조금씩 우울한 감정이 일었다. 분명 지금 행복한 게 맞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이걸 도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김지혜교수는 책 <가족각본>에서 성별분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가 남성에게 일자리를 우선해 주는 성별분업의 이념을 유지하면서 고용상의 불평등만 해결하려고 하면 여성은 가사에 책임을 느끼는 동시에 임금노동에 부담까지 껴안게 된다고 한다. 지나고 보니 이때의 내가 딱 그랬다.



내가 살고 있던 집의 가치가 얼마든 그건 당장 현금화 할 수 없었다. 통장을 스치고 마는 남편의 월급이나,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집의 가치는 둘 다 사이버머니처럼 느껴졌다. 자산이 얼마나 늘었든 현실의 나는 여전히 2억 원의 빚을 지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절약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동안 스스로를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 내게 수필강의는 현재와 미래를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언제까지 덜 쓰는 방법만으로 현실을 꾸려갈 수 없다는 점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때의 내가 당장 하고 싶은 일은 좋은 글을 쓴다거나 책의 저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생활수준을 끌어올려줄 돈이 필요했다. 오직 돈이어야 했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도 말하지 않았는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적인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글쓰기 이전에 내게 필요했던 것은 수입을 늘릴 전략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을 거란 믿음으로 그날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골몰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을 나열해 봤지만 아이가 유치원에 있는 다섯 시간 반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전무했다. 잡코리아를 뒤적이느라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던 어느 날은 그만 눈물이 났다. 사람을 구하는 곳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일할 자리가 한 곳도 없다는 게 서러웠다.



경력단절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한때는 회사의 팀장으로 사람을 뽑는 일만 했었던 내가 한동안 집에 갇혀있었다는 이유로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신세가 되자 포털사이트를 뒤적일 때마다 울지 않는 게 더 용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문장을 생각하며 되는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별 기대 없이 한 플랫폼에 내 경력과 해왔던 일을 적어 프로필을 완성한 것도 그중에 하나였다. 기회는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3월에서 계절이 한번 더 바뀐 8월의 어느 날, 나는 마스크를 낀 채 카니발을 렌트해 친정부모님과 함께 제주여행 중이었다.



그때 한 회사에서 내게 의뢰를 해왔다. 추석에 회사 홈페이지와 사원들에게 발송되는 메일에 띄울 문구를 써달라는 제안이었다. 간단하게 네 문장이면 충분하다는 말에 바로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다. 제주시의 한 호텔에 누워 그 회사의 히스토리를 읽어가며 고민 끝에 추석인사말을 완성했다. 그 네 줄의 문장을 쓰고 내가 받았던 금액이 3만 원이었는지 5만 원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어머 글이 너무 좋아요!'라고 말했던 담당자의 답신이었다. 좋아요로 시작해 수정할 필요도 없다, 감사하다로 이어지는 짧은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 간절했던 건 돈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정이었다는 사실을.


좋은 엄마와 아내로 사는 일도 중요했지만, 그 외에 내가 가진 능력,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가족들을 제외하고도 오롯이 혼자 설 수 있는 나만의 시간과 자리가 간절했던 것이다. 이 일을 시작으로 나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조금씩 나만의 일을 해내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어느 사보회사와 비정기적으로 일하게 되면서 기내에 들어가는 잡지에 글을 쓰게 되었고, 정기적으로 IT기업에 칼럼도 맡았다. 몇만 원에서 시작했던 금액은 20에서 40으로, 40에서 80으로 점점 커졌다. 몇 달이 지나고 마침내 150 이상의 수입을 찍었을 때 나는 드디어 됐다! 싶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빠르게 집안일을 끝내고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출근했다. 결혼할 때 친구들이 공방에서 맞춰준 1800짜리 나무 책상에 앉아 하루에 3시간 정도 일을 했고, 오후에는 육아에 전념할 수 있었다. 교통비와 식대가 따로 들지 않는 데다 출퇴근 시간낭비마저 없는 일. 경력을 살리고 사람을 상대하는 스트레스조차 적은 일이었기에 단점을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이 완벽한 날들이 지속되었다. 그쯤엔 내가 사는 집이 얼마든 내가 얼마의 생활비를 쓰든, 그런 것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잡코리아를 보며 울었던 날들은 흐릿해졌고, 일을 하며 느끼는 행복감으로 일상은 충만해졌다.



돈을 번다고 해서 생활수준을 다시 끌어올리거나 비싼 물건을 사게 되지는 않았다. 미니멀라이프는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 녹아들었고 이미 구체화시킨 소비패턴도 자리를 잡은 이었다. 글을 써서 얻게 된 수입은 모두 남편의 계좌로 입금하며 대출을 줄여나갔다. 이런 날들이 언제까지고 이어졌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사는 일이 늘 그렇듯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인생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선선히 우리 뒤통수를 치고 만다. 아무리 적어도 최소한 100만 원의 수입이 매달 유지되고 있던 내 프리랜서 인생에도 예기치 않았던 빨간불이 들어왔다. 회사사정으로 정규원고들이 하나둘씩 취소된 것이다. 새로운 원고들을 받긴 했지만 일회성일 때가 많아 다음 달에 당장 얼마를 벌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어떤 달은 예상외로 수익이 많았지만 어떤 달은 처참했다. 나는 침울해져 갔다.



회사들이 쓰러지고 홍보나 광고에 돈을  쓰게 된 시기, 나의 계좌도 서서히 말라갔으며 행복감도 쪼그라들고 있었다. 감정변화가 다채로운 나를 보며 남편은 높낮이도 없는 목소리로  '프리랜서라면 다 겪는 일이야. 견뎌야지!' 하고 말했다. 참나, 평생 프리랜서로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안정적인 직장인이 내 처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해주는 조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내 표정을 흘끗 보는 거 같더니 말을 이었다. "걱정할 거 없어. 자기가 40만 원을 벌면 1억을 버는 거나 마찬가지고, 20만 원만 번다고해도 그건 5천의 가치가 있거든." 이과남자는 내가 버는 돈을 1억에 대한 이자로 생각하면 그건 1억을 버는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나를 위로했다. 5%의 금리를 적용한 신박한 위로에 문과여자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이 말은 이상하게 내내 마음에 남았다. 돈을 덜 벌게 된 달에도 그 돈의 가치를 더 크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봇 같은 이과남자가 숫자로 마음을 어루만져 주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어쩌면 우리가 이토록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의외의 지점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잘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나는 그의 건조하기 짝이 없는 위로를 가끔 떠올리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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