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데, 모두가 남처럼 대하라고 한다.
이사를 앞두고 가장 마음이 쓰였던 건 막 열한 살이 되던 첫째 아이였다. 사춘기 초입에 들어서는 아이에게 전학이 어떤 의미가 될지 몰라 두려웠다. 아이가 평생 안고 갈 상처를 받으면 어쩌나, 이사 갈 곳의 분위기가 지금과 달라서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어 머리가 아팠다.
인터넷에 전학 갈 학교 이름을 써넣고 검색어를 바꿔가며 작은 정보라도 건지려고 애쓰는 나와 다르게 남편은 아이의 전학에 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남일이 따로 없었다.
"아이들은 다 적응해! 믿어주자"
믿어주긴, 그건 남편이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아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전학을 앞두고 딸은 전학 가기 싫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슬픈 감정을 드러냈고, 친구들과 헤어지는 일을 속상해했다.
열한 살은 어린 나이였다.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매번 확인하는 딸에게 남편은 '믿는다'는 말을 핑계로 정작 무관심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나에게도 우리 아이가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에 평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가 살던 지역은 학군지에서 멀지 않았다. 아이가 반장이었기 때문에 반대표인 나를 중심으로 매달 반모임이 이뤄졌다. 친해진 엄마들은 집값이 이렇게 내려가는 시기에 상급지도 아니고 하급지로 이사한다는 말에 우려의 시선을 보냈고, 한 마디씩 보태며 나를 불안하게 했다.
"채니가 똑똑하잖아. 여기 있으면 전교회장도 하겠는데 학원도 제대로 없는 곳에 가서 괜찮겠어?"
"애들도 분위기 따라가는데 잘 생각해 봐!
집이 두 채 있는 것도 좋지만 지금 같은 때에 투자하는 거 아니야"
"4학년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알잖아!"
이미 큰 아이를 키워내며 인생과 육아경험이 쌓인 엄마들이 대부분이었고, 경제적 자유 근처에 가있거나 부동산을 꿰뚫고 있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충고를 마냥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외곽에서 학군지로 이사 오는 경우는 있어도 학군지에서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충고가 당연하기도 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어서 돌이킬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걱정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내가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자 남편은 조금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기야, 자식도 결국엔 남이야. 우리 둘만 남는 거야"
어? 뭐라고? 이 냉혈한 이과남자 같으니라고!
아이의 희로애락을 내 일처럼 느끼는 나는 마음이 쓰여 괴로운데 자식과 선을 긋는 것도 모자라 남이라고 말하는 평온한 남편이 얄밉기까지 했다.
"남한테 내 노후를 책임져 달라고 할 수 있어? 지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아이들은 어디서도 잘 지내. 노후에 돈이 없는 부모가 자식 앞길을 막는 거야."
남편은 아이가 성인이 되면 결국 각자의 인생을 사는 남이라고 했다. 비싼 교육비를 내느라 노후 준비를 하지 않거나, 변화가 두려워 이사를 못하고 한 곳에서 살면서 투자를 안 하면 오히려 아이의 인생이 불행해진다고, 우리의 목표를 잃지 말자고 나를 설득했다.
남편과 살면서 나와는 다른 생각과 시선에 놀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엔 그 충격이 더 컸다. 그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부모님이 은퇴하신 지금 내가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두 분이 오전엔 파크골프를 치고, 오후엔 탁구를 치며 정겹게 동네맛집을 탐방하는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이 건강하고 즐겁게 사셔서 기쁜 동시에 양가에 용돈을 드리지 않아도 되고, 병원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감사했다.
우리 자매를 키우면서 엄마는 늘 아꼈다. 얼마나 아꼈는지 꽤 오래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재수를 한다는 말도, 유학을 가고 싶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일로 부모님을 원망한 적도 없었다. 학자금대출을 오래 갚는 친구들을 보며 오히려 감사했다. 남편은 어떻게 여기까지 그려볼 수 있었던 걸까.
"책을 읽으면 돼. 거기에 다 있어"
나는 사랑은 주되, 아이와 나를 분리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인생의 중심을 아이에서 나로 옮겨오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쉽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안함과 걱정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3월 2일 전학 후 일주일 만에 치러진 회장선거에서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자신을 뽑아달라는 소견문을 오래오래 작성하는 모습에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나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엄마 나 부회장 됐어!'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들어서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믿어준다는 남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딸은 학기 초 전학생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부회장이 된 것도 모자라 2학기엔 학급회장에 당선됐다. 집에 와서 나에게 남긴 소감엔 야망이 가득했다. "엄마, 나 전교회장도 나가야 되는데 다른 반에 아는 친구가 별로 없어. 빨리 친해져야지!"
어떤 결핍은 우리를 상상도 못 할 만큼 성장시킨다. 우리가 안정보다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여전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와 남이 되는 일, 손님과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일은 나에겐 숙제지만 소중한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남편과 또 손을 잡고 나아가 보기로 했다. 다 무너진 모래성에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남편과 새로운 시작을 도모했다.
*이 글은 브런치북 '경제적 자유 갈망기'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