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 아이스크림 가게는 성업을 이뤘다. 채워두기 무섭게 같은 품목을 열개 스무 개씩 사가는 사람들 덕분에 비비빅 같은 전 국민사랑템은 한 번에 세상자씩 주문해야 할 만큼 분주한 계절이었다. 그쯤 오르는 매출로 신나 있던 남편과 다르게 나는 세 달 만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일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만큼 가게는 지저분해졌고, 무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했다. 가장 큰 이유는 팔고 싶은 게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책이나 컵, 또는 나의 가치를 인정받는 곳에서의 노동력이었기 때문일 거다. 하고 있지만 재미있거나 신명 나지 않는 일. 그럼에도 무인매장이 내가 가진 선택지 중에 가장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일보다 몇 배는 더 쉬웠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일 년 중 매출이 가장 정점을 찍는 계절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일곱 살 아들 녀석이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엄마 있잖아. 그림에 있는 열매를 열개씩 묶은 다음 네모칸을 채워보세요. 이거 너무 어려워. 잘 모르겠어"
아이가 문제를 기억하고 말하는 게 기특하고, 겨우 열 묶음씩 묶고 낱개를 적는 게 인생의 어려움이라는 게 생각할수록 귀여워서 웃으며 말했다.
"어려웠어? 괜찮아. 못해도 괜찮아."
아이는 답답한 듯 말했다.
"엄마 그 말이 아니잖아. 알려달라는 거잖아."
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이는 잘하고 싶은데 잘하지 못해서 방법을 묻고 있었다. 거기에 못해도 괜찮다는 대답을 해놓고 가장 놀란 사람은 나였다.
부모님의 기대와 바람을 온몸으로 품고 자란 나의 또 다른 이름은 장녀였다. 엄마는 늘 내가 잘하길 바랐고, 그런 마음조차 숨길 생각이 없어 동생과의 비교도 서슴지 않았다. 엄마가 학부모총회에 다녀온 날은 유독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이 내 칭찬을 하지 않았단 이유로, 주목받았던 학생이 내 친구였다는 사실에 엄마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핸드백을 던지듯 내려놓고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에게 단체생활 적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여기에 더해진 엄마의 기대와 바람은 내 유년시절을 더 힘겹게 만들었다. '그때 엄마가 나에게 못해도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어땠을까' 성인이 된 이후로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고, 엄마 품을 벗어난 뒤 스스로에게 못해도 괜찮다는 말을 참 많이도 했었다.
그뿐인가 "괜찮아. 뭐 어때, 좀 못해도 괜찮아." 그런 말들을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건네면서, 엄마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믿었다. 아이들이 바라는 게 잘할 수 있다는 격려일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못해도 괜찮은 게 아니라, 잘하고 싶다고 방법을 알려달라는 아들의 말을 듣고서야 이미 오래전에 떨쳐버려야 했을 마음을 끌어안고 있는 내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뜨거운 8월, 아이스크림 2호점의 문을 연 건 뒤늦게 잘해보자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재미없던 아이스크림가게 운영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없던 의욕이 솟았다. 이 시간을 쌓고 나면 내가 좋아하는 컵을, 책을, 글을 팔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사실 나는 못해도 괜찮았던 게 아니라 실은 늘 잘하고 싶었다는 걸 아들 덕분에 알게 됐다.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가 바랐던 것이자 아이에게 주어야 할 건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것도. 1호점과 차로 5분 거리에 가계를 계약하고 8월의 여섯째 날, 시원바삭아이스크림 2호점의 간판을 걸었다. 이번만큼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