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중히 쓰는 것
'사랑'이란 말을 떠올리면 가족의 얼굴이 가장 먼저 생각나지만 요즘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존재가 있다. 그건 바로 돈이다. 돈을 사랑한다니, 이렇게 속물적인 고백이 또 있나 싶은데 요즘의 나는 정말 그렇다. 불과 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내가 무인아이스크림점 사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돈은 내 인생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수많은 경제서적, 재테크 관련 책에서 돈을 사랑하라는 문장이 등장할 때마다 오히려 의아했다. 필요에 의한 수단일 뿐인 돈을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라는 거지?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떻게'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수입과 지출을 어플에서 확인하는 나에게 돈은 물질보단 숫자였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점을 운영한 이후엔 상황이 달라졌다. 현금 겸용 키오스크기계를 사용하면서 기계에 현금이 쌓였고, 그 돈을 일일이 세서 은행에 입금하는 게 일과 중 하나가 됐다. 거스름돈을 위해 동전과 천 원짜리 수량을 체크해 기계에 넣다 보니 나는 매일 돈을 만지게 됐다. 이렇게 돈을 가까이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돈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겨우 매일 돈을 마주한다는 걸로 내가 돈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도 단계가 있듯 영업 초반에는 돈에 대한 관심 정도에 그쳤을 뿐 사랑이란 말을 갖다 붙일 정도는 아니었다.
최근엔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돈을 진짜 사랑하게 되었구나를 느끼게 된다. 어느 정도냐면 이 구역에서, 나만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는 확신이 들 정도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돈을 다리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정성껏 다린다. 다림질이 하기 싫어서 원피스도 티셔츠도 온 힘을 다해 탁탁 털어서 널었던 내가, 남편 셔츠를 다리기 싫어서 링클프리 이지케어를 찾아 헤매었던 내가 이 여름에 지폐를 이백 장씩 다리고 있다. 그렇게 돈을 다리미로 쫙쫙 펴고 있을 때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솟는다.
돈을 다리기 시작한 건 시간 때문이다. 어느 순간, 인생의 날들을 더해오면서 나는 문득 돈보다도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한때는 물 쓰듯 썼던 시간, 나에게 누구보다 넘쳤던 그 시간이 어느 날 귀중하게 느껴졌다. 예전엔 그걸 몰랐다. 그래서였을까, 새벽 두세 시에 퇴근하고 날이 새도록 동료들과 신세를 한탄했다. 겨우 열정페이쯤을 받으면서도 그 길이 꿈으로 가는 유일한 경로라고 여겼고, 일하는 시간의 가치를 돈으로 한 번도 환산해보지 않았다. 시간을 길에 뿌리고 출퇴근했던 시절에는 나날이 소진되는 몸의 피로를 고려하지 않았다. 있는 거라곤 시간밖에 없던 시절, 나는 돈이 없어서 또는 돈을 잘 몰라서, 그것보다도 시간의 소중함을 잘 알지 못해서 그렇게 살았다. 시간의 소중함을 먼저 깨달았던 사람들은 시간 절약을 위해 기꺼이 돈을 쓰고 직업을 바꾸고, 인생의 경로를 수정해 나갔다. 내가 시간을 아까운 줄 모르고 썼던 때에도, 육아에 너무 지쳐서 시간이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에도 말이다. 나를 지나간 너무나 많은 시간이 사라진 후에야 나는 뒤늦게 시간의 소중함을 알아버렸다. 어쩌면, 시간이 소중한 줄도 모르고 몸을 혹사시켰던 그 시절을 통과했기에 내게도 시간과 바꿀 수 있는 돈이, 무엇보다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돈을 다리면서 시간을 아낀다. 돈을 다리기 전엔 키오스크 기계에 현금이 껴서 고장 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은행에서 새 지폐로 바꿔 넣으니 반대로 새 돈이 붙어서 여러 장 인출되는 문제가 생겼고,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가게로 달려가면서 기름값과 왕복 한 시간을 아깝게 낭비해야 했다. 빳빳하게 잘 다려진 지폐는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덕분에 나는 이 여름에 수북하게 쌓인 천 원짜리 뭉치를 두고 다리미를 켜고 돈을 다리며 시간을 쌓는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쌓은 시간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에, 나를 건강하게 하는 일에 소중히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