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 살이 시즌 3
2018년 11월에 전주로 취업했다. 전주시사회혁신센터 성평등전주. 2015년에 ‘귀촌’이라는 변수를 주었듯 완주가 지루하던 차에 전주로 생활 반경을 넓히면 좀 달라질까. 게다가 페미니스트 동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니. 이거야 말로 ‘좋아하면서 잘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생활과 신념을 일치시키겠다는 거창한 꿈을 꿨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과 일한다는 기쁨에 설렜다.
회사에 다닐 수 없는 인간이 아닐까 의심하던 과거의 나는 이제 달라졌을 거라고, 여기라면 다를 거라고, 직장인이든 아르바이트생이든 백수든 다 똑같지 않았냐며 자신을 설득했다. 나는 일하고 싶었다. 돈도 필요했다. 친구들과 팟캐스트를 만들면서 좋은 동료들과 함께 했던 즐거운 경험이 내가 ‘일하는 사람’임을 상기시켜줬다.
처음에는 출퇴근 하는 게 힘들어서 피곤했지만 적당히 들뜬 마음으로 지냈다. 행사를 기획하고,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고 지원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직장인 생활에 적응이 되자 아침에 공원을 달리고 개운하게 출근했다. 무기력하고 괴로운 시기에는 거의 누워 지내고 늦게 잠들고 늦게 일어나는데 다시 6시에 일어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5월쯤 되니 또 우울하고 괴로운 시기가 찾아왔다. 이쯤되면 직장인이냐 백수냐, 도시냐 시골이냐가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지난 10여 년동안 여러 명의 상담사를 만났지만 잘 맞는 상담사를 만나지도 못했거니와 비용도 부담되어서 지속하기 어려웠다. 회사 생활의 목표는 ‘성평등한 세상과 페미니스트로서의 나’가 아니라 ‘꾸준한 상담을 통해 나의 우울을 바로 보기’로 바뀌었다. 회사가 지겨워지면 상담비와 고양이를 생각하면서 버텼다.
전주로 출퇴근을 시작하면서 완주군 귀촌인의 나의 정체성도 사라졌다. 아르바이트했던 카페가 위치한 곳은 귀농귀촌인이 많이 모여사는 고산면. 고산을 중심으로 다양한 일들이 벌어진다. 공동육아, 청소년센터, 청년공간, 마을부엌, 벼농사두레, 미디어센터, 마을신문 등 사람이 모이는 거점도 많고 사람도 행사도 많다.
나는 한발짝 물러서 마치 완주에 없는 사람처럼 산다. 시간을 내자면야 퇴근 후나 주말에 하는 모임에 참여할 수도 있을 테지만 마음이 나지 않는다. 토요일엔 상담을 가야하고 일요일엔 집안일과 휴식이 필요하다. 같이 놀 사람이 없어 심심하지만 귀농귀촌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고산에 가면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대신 본인을 귀농실패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자주 떠오른다. 갓난 아기와 함께 귀농했다가 유아차를 끌고 마실 나갈 마트도 문화센터도 없이 하루 종일 혼자서 육아에 지친 친구는 결국 서울로 돌아갔다. 집성촌 마을 초입 귀농인의 집에 살던 친구도 차가 없어 동네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집 밖 상황도 좋지 않아서 산책을 할 만한 길도 없었다고 한다. 한두 달 마을과 아무런 교류 없이 지내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다. 두 사례는 귀농귀촌인이 많지 않은 지역에 외따로이 살아서 적응이 어려웠다고 할 수도 있다.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혼자서 생전 처음보는 마을 분들, 살아온 배경과 처한 조건이 다른 세대와 어울리기는 쉽지 않으니까. 대부분 귀농귀촌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자연스럽게 먼저 그들의 커뮤니티에서 사람을 사귀고 차차 지역을 알아간다.
반면 커뮤니티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적은 있지만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지역 살이에 큰 기대를 품고 공동체가 살아있는 청년 커뮤니티를 만들어 활동하겠다던 친구는 답답한 행정에 제일 처음 실망했지만 카페를 빌려 영화상영회를 열고, 모임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생각보다 느리고 어긋나는 반응들에 질린 듯했다. 외식을 할 수도,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는 고산면이 답답하다며 전주로 이사 갔다. 지역에 청년들을 보내 살아보게 하는 사업을 통해 마을 기업에 인턴으로 왔던 친구는 인턴생활을 마치고 목조주택 현장에 일자리를 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본인의 기대나 관심사와 다르다며 가끔 고민을 얘기하곤 했는데 지금의 나처럼 지역 커뮤니티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사례발표도 하고, 지원금도 받고, 동네 사랑방인 카페에서 일하면서 지역 커뮤니티에 그나마 적극적으로 개입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 큰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겠지만 우연히 읍내 마트에서 지역분들을 만나면 아직도 완주에 살고 있었어? 라고 묻는 걸 보면 그렇게 조용히 사라진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정착에 도움을 주고 기반이 되는 인물이나 단체를 만나는 게 적응하기 수월한 편이지만 누구에게는 평생 은혜를 갚아도 모자라는 곳이 다른 누구에게는 상처뿐인 곳이기도 하니 귀촌생활이든 도시생활이든 인간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나는 크게 상처를 받았다기보다는 시절의 인연이 다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지역의 여성모임 완주숙녀회를 만들면서 혼자만의 기대와 속도 때문에 동료들과 갈등을 겪었고 그 갈등을 풀려고 하는 방식의 차이로 또 상처를 받았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니까, 상황도 늘 변하니까, 지금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2020년 12월, 이 회사에 다닌 지 2년 1개월이 지나갔다. 컨디션은 좋았다가 나빴다가 한다. 그나마 우울한 가운데서도 꾸준히 글을 계속 썼고 뭐라도 하는 사람답게 동료와 만화 그리는 모임도 만들어보고, 유튜브도 개설해 봤다. 만화 그리는 모임은 몇 개월 후에 사라졌지만 가끔 혼자서 그림을 그린다. 유튜브도 한 달 하고 멈춘 상태지만 시작해본 감각이 있으니 다음엔 더 쉬울 것 같다. 회사 일에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지만 계속 하기는 힘들 것 같아서 연말에 계약이 종료되면 계속 일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많은 게 달라져서 일이 더 재미없게 되었다. 아프지 않고 생계에 위협을 받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지만 어디 사람이 그것만으로 살 수 있나. 나는 뭐라도 해야 하는 사람인 걸. 재미를 찾아 일이 되는 순간을 그리워하는 사람인 걸.
한창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하루에 일기를 다섯 장씩 쓰고 일주일에 다섯 권씩 책을 읽어댔다. 자정을 넘기도록 잠들지 못하고 휴대폰을 붙들고 트위터를 떠돌다가 다음날 아침 8시 반에 겨우겨우 일어나 지각을 면할 정도로만 출근했다. 5분도 일찍 출근하기 싫어서 주차장에서 59분까지 기다리며 또 일기를 썼다. 서울에서 회사 다닐 때랑 똑같이 괴로운 심정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문득 출퇴근길에 지나치는 강과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위로가 되었다. 언제까지 여기에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삶터를 옮긴다 해도 자연 가까운 곳으로 갈 것이다.
다행히 10월에 들어서자 컨디션이 좀 나아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달린다. 10km 마라톤도 신청했다. 내내 걷기는 했지만 그래도 완주 메달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자전거로 출근한다. 새 책도 계약했고 친구들과 쇼핑몰 사업도 시작했다. (차 마시는 생활을 제안하는 해외구매대행 큐레이션 숍이다. 어라운드4. 커피를 그렇게 마시던 내가, 요즘은 식도염때문에 주로 허브차를 마시고, 종종 녹차와 홍차도 조금씩 마신다) www.around4.kr
독립출판 워크숍에서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배웠고 2015년에 출간한 전자책 <나혼자 발리>를 소장용으로 한 권 만들었다. 완주미디어센터에 아이패드 드로잉 강좌를 신청해서 요즘엔 거의 가지 않는 고산에도 다시 드나들었다. 이렇게 감정이 너무 날뛰면 이렇게 질주하다가 실수하거나 고꾸라져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그나마 1년 넘게 상담을 다니면서 이런 내 모습을 더 빨리 알아차리고 담백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조심하면 된다. 우울할 때 그랬던 것처럼.
여기까지가 2015년 전북 완주군으로 귀촌해서 2020년을 살고 있는 나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