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을 잃어버려서 생긴 일.
이번주에 이어폰을 잃어 버렸다. 혼자 살면 서러운 일 중 하나는 나를 깨워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다. 십 분만에 고양이 세수를 하고 헐레벌떡 나가는 출근길에 택시에 버젓하게 이어폰을 놓고온 모양이었다. 혼자 잘 다니는 연습을 한다고 하지만, 이어폰은 내 필수의 동행자여야 한다. 고막을 틀어막고는 혼자도 괜찮은 척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거리를 활보해야 하는데, 새 이어폰을 받을 때 까지는 별 수 없이 그냥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또 조금 외로운 것 같아서 고개를 처박고 또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보는 척을 하며 길을 걸었다.
주말에 한 번 씩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정말 오롯하게 나만을 위한 소비를 하는 것이다. 그 무엇이라도 좋다. 집에 있지 않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 보고싶던 영화를 본다든가 벼르고 있던 화장품을 구경하러 백화점에 가기도 하고, 맛있는 빵집을 물어물어 찾아가기도 한다. 집에서 곱게 준비를 하고 거울 속의 단정한 내 모습을 체크하고 밖으로 나갈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리스트를 켜서 좋아하는 음악을 재생하는 것이다. 그 날은 어딘가 허전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영화 상영 전까지 제법 시간이 남아서 50분 정도 되는 거리라 슬슬 걷기로 했다.
세상엔 생각보다 많은 소리들이 곁을 맴돌고 있었고, 그것은 가을의 소리였다. 이내 혼자라는 어색함을 이겨내고 천천히 동네를 가로질러 압구정까지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닿을 때마다 터덜거리는 나의 신발소리,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이 바작 하고 찌그러지는 소리. 끼어든 차에 불안하게 ‘빵’ 하고 울리는 경적 소리. 그리고 바람이 귓가를 스칠 때 울리는 저녁 무렵의 소리. 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비단 살갗에 닿는 날씨의 온도나 군고구마 혹은 붕어빵이 익는 냄새 뿐만 아니라 소리 또한 그 몫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사랑했던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지나치게 뚫어져라 예의주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행인들의 모습과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세상을 본다고 했다. 당시에는 무슨 취미가 그래요 하고 픽 웃었으나 턱을 괴고 카페 창가에서 그러고 있을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괜히 또 설렜던 기억이 난다. 딱히 좋아하는 음악이 없어 라디오만 듣는다고 했던 그는 길을 걷는 와중에도 늘 이어폰 없이 걷는 것은 아니었을까.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연인의 저녁거리를 고민하는 대화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앗 추워 무슨 날씨가 이래’ 투덜대는 두 친구의 대화를 들으며 잘 걸친 그녀들의 팔짱에도 시선이 갔다. 이것이 그가 말하던 자연스러운 엿봄과 관찰인 걸까. 갑자기 잊혀졌던 그 생각까지 나는 걸 보면 가을이긴 맞는것 같다.
걷는 일은 지루하지 않았고,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여 상영관에 먼저 앉아 있었다. 보고 싶었던 영화의 관람객은 10명 남짓 되었고,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하염없이 올라가고 있는 엔딩 크레딧이 끝을 보이고 있음에도 나는 쉬이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여운에 젖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마음이 풍성해져서 또 다시 걸어가볼까 하다가 마침 오는 버스를 발견하고 냉큼 탔다. 세상이 돌아가는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았던 그날. 왠지 나의 행동 하나가 옮겨지는 그 소리에도 마치 우아한 움직임 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자못 좋았다.
단풍이 다음주까지 절정이라고 한다. 크고 작은 산들에는 당분간 단풍만큼 알록달록한 아웃도어 복장을 한 등산객들로 쉴 틈 없이 북적일 것이다. 하지만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비단 단풍놀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엔 작은 것을 통해서 더 큰 것을 얻을 수도 있다.그리고 관련 없는 것들은 없다. 나는 이번주에 이어폰을 잃어버림으로써 가을을 느끼게 되었다. 계절 뿐만이 아니라 그 계절이 주는 무드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