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위기'는 다양한 형태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 위기를 통해 죽고 싶을 정도의 혼란스런 감정을 체험하면서 '자신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가', '왜 자신은 지금 여기에 있는가' 라는 '대답 없는 물음'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대답 없는 물음과 맞서보지 않았다면, 또 그 위기를 체험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자신과 만나게 된다.
마쓰야마 준, <강심장 봉과장의 상사노릇> 中에서
2030 이라는 말에서 ‘청년’이라는 단어를 유추해 날 수 있고, 4050 이라고 적고 중년을 떠올린다. 2030에 쏘아올린 결혼이 별거나 이혼, 혹은 졸혼으로 끝나지 않고 끝까지 행복한 서로 해로하며 살기 위해서는 4050 부부관계가 핵심이다. 정말로 평탄한 인생의 운을 갖고 태어난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정의 안팎으로 크고 작은 문제를 겪게 된다. 의리와 신뢰를 바탕으로 단단해진 부부관계가 아니었다면 누구나 반드시 위기를 맞게 된다. 부부관계의 핵심 역시 ‘사랑’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보다 의리와 신뢰가 우선이 되는 시기이다. ‘의리’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배우 김보성과 함께 걸걸한 목소리와 특유의 몸짓이 떠올라서 뭔가 남성들간의 우정을 상징하는 단어라고 여겨질 수 있다.
나는 부부 사이에서 의리란 이성에게 노골적인 유혹을 당하든, 혹은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설렘을 느끼든 곧바로 배우자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유혹이 많은 세상이다. 맞벌이 부부의 예를 들어보자. 집에서는 씻지도 않고 두둑한 살찐 배를 내놓고 낮잠을 자고 있는 남편, 어느새 머리숱도 많이 줄어져 있다. 내가 처음에 결혼했던 남자가 과연 맞을까 싶을 만큼 한숨이 나온다. 남편이 보는 아내도 이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늘 화장기 없는 아내, 얼굴에 가득 핀 기미와 굵어진 팔뚝, 결혼 전과는 전혀 다른 억센 성격에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고 있는 포인트는 내가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 배우자가 밖에서는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외부에서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성을 만나더라도, 그리고 의도와 상관없이 심장이 두근거리더라도 곧바로 배우자를 떠올리며 그래도 내 남편(아내)이 최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순간의 유혹을 떨쳐내는 게 정말 중요하다.
정신과 의사 문요한의 저서 [오티움]이라는 책에서는 중년의 위기에 대한 부정적인 대처 받법 중 하나로 체념을 꼽고 있다.
‘이게 나의 전부이구나! 이제 내 삶은 내리막이구나! 라고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 허무함과 씁쓸함을 달래려고 중독이나 외도와 같은 순간적 쾌락 앞에 몸을 내맡긴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외도에도 유형이 다양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쾌락이라는 유혹에 무너진다는 표현은 성급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 삶에 대한 체념으로 외부에 눈을 돌린다는 의견에는 격한 공감이 갔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가장 전형적인 외도의 형태라고 보여지는데 다만 불법 성매매처럼 1회성 잠자리에 중독되느냐 아니면 밖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연인을 만드느냐 방향의 차이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재석은 부산 출장길에 대학교 동창 A를 만나 모처럼 술을 기울였다. 서로의 결혼식과 큰 아이 돌잔치에만 참석한 이후 사는 지역도 다를 뿐 아니라 먹고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일 년에 한 두번 겨우 통화하곤 했다.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근황을 물었다. A는 재석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을 만나서 결혼에 성공했다. 재석은 A의 결혼식장을 찾아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서둘러 축하를 하고 돌아온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좋아한다고 고백조차 하지 못했던 여인에 대한 아련한 심정과 친구에 대한 우정이 가슴속에서 충돌했다.
어느덧 배가 나오고 이마와 눈가에 주름이 깊어지고 5년 만에 만나서 옛날 일을 추억하자 서로 진솔한 얘기가 쏟아져 나왔다.
“나 만나는 여자 있거든? 재미 보고 있었는데 얘가 슬슬 선을 넘더라고.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주의 줬는데 평일 저녁 시간에 전화오고... 이제 관계 정리할 때가 된 거 같아.“
행복하게 살 거라고 친구가 자랑스럽게 애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걸 보고 재석은 한동안 충격 받아서 술만 들이켰다. A는 재석의 속도 모른 채 재석의 배를 쿡쿡 찔렀다.
“우리 임마, 지금 애인 없으면 앞으로도 애인 하나 못 만든다, 알겠어? 더 나이들면...머리는 더 벗겨지고, 배는 더 나오고, 우리 상대해 줄 여자는 더 줄어들어.”
재석은 가정에 딱히 불만도 없으면서 밖으로 딴 짓하는 A가 밉고 한심했다. 그러나 출장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그 이후에도 이상하게 A의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았다. 회사에서는 심리적 명예퇴직의 압박을 받는 나이였고 밑에서 후배들을 무섭도록 치고 올라왔다. 그렇다고 집에서 사회생활의 힘듬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매일 육아와 집안일에 지친 아내와는 어느덧 단 둘이 있으면 어색한 사이가 됐고 사춘기인 아이들을 아빠와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노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부모님까지....재석은 버거운 현실에 가벼운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찾아오며 일에도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남은 인생에 희망이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가정을 위협하는 크고 작은 위기는 모든 가정에 어김없이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가장 단 칼에 관계를 끝내는 건 다름 아닌 ‘외도’라는 행위이다. 가정을 깰 마음이 전혀 없었든 외도를 통해 환승이별, 환승관계를 생각했든 현재가 맺고 있는 관계 자체에서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고, 해결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도 노력을 할 만큼 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 채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남 탓을 해봐야 옆 사람만 바뀌어나갈 뿐, 순간의 쾌락 뒤에 찾아오는 건 언제나 후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