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불륜의 재정의
심한 고통과 분노의 시간이 있었지만 내 인생의 절반을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는 좋은 사람 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어질 깊은 끈이 우리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
이제 실전이다. 일은 벌어졌다.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챘고, 알아버렸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흥신소에 의뢰를 하거나 직접 미행을 따라 붙는 경우도 있다. 블랙박스와 불법 녹음을 다 시도해서 일단 증거부터 모으고 본다. 짝짝짝. 아주 잘 하는 행동이다. 단, 조건이 있다. 이 모든 행동은 이혼소송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 이다. 만약 증거를 다 모아서 남편에 대한 협박 및 자백용으로 불륜에 기름 붓는 행동을 한다면 이는 모두가 불행해 지는 일임을 꼭 말해주고 싶었다.
이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이혼 이후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스스로 냉철하게 판단해 보자. 감정적인 선택으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고운정과 미운정이 사라지며 부부관계가 느슨해지지 않았던가. 이제는 감정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다.
도저히 신뢰를 져버린 남편을 용서할 수 없고 그나마 ‘아이’를 위해서 아이의 부모로써 만이라도 아이가 클때까지 살고 싶었으나 그 모습을 깨져서 회복이 불가능 하다는 판단이 들면 그땐 이혼을 추천한다. ‘말싸움’ 이라는 형식을 빌어서라도 서로 치고 받는 대화를 하고 싶다면 희망적이다. 옛말에 많이 싸우는 부부는 이혼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고성이 오가도 서로의 잘못을 지적 하다가 극적인 화해가 도출되기도 한다.
아마 부부싸움은 칼로 물배기 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문제는 서로의 대화조차 차단된 부부일 것이다.
평소에도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이후, 대화 없이 변호사를 통해서만 부지런히 이혼과정을 논의 하다가 2년에 걸친 소송 끝에 이혼을 하고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 지인이 있다.
혜정은 요새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다. 사건의 발달은 약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주 단란한 가정까지는 아니어도 혜정의 결혼생활에 이혼의 위기가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평소에 대화가 많지 않은 만큼 결혼생활 10년 동안 별다른 다툼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행복하지 않다느니, 오랫동안 성생활이 없었다는 둥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편을 어르고 달래고 화도 냈다가 딸 둘을 이혼부모의 자식으로 만들어서 상처 주고 싶냐는 협박도 했다. 아이들 얘기에 잠시 며칠간 멈칫 하기도 했지만 이혼 요구는 계속 됐다. 결혼생활 대부분을 전업주부로 아이 둘을 양육하면서 보낸 혜정은 아이가 남편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임을 알았다. 아이를 앞세워서 남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이 입을 통해서 왜 남편이 정신을 차려야 하는지 대신 전달했다.
‘아빠, 나는 아빠랑 8년밖에 못살아?’
남편의 얼굴에서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커지는 걸 보고 남편의 중년 사춘기가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 지인을 통해서 남편이 다른 여자와 다정한 자세로 밥을 먹고 있다는 얘기를 접하고는 하늘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흥신소에 거금을 주고 의뢰했다. 결정적인 장면 즉 호텔 출입 사진이나 껴안고 있는 사진, 블랙박스에도 별다른 건 없었다. 그래도 미혼인 여자의 집에 들락날락 거린다는 건 충격이었다. 외도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혜정은 흥신소에서 받은 사진 몇 장으로 변호사를 찾아갔고 이혼 소장을 보냈다. 동시에 애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이혼을 할 생각이었다. 남편이 아무리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 전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남편 역시 이혼 ‘반소’를 한 것이다. 쇼윈도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다고 했다. 친정 부모님께 신세를 지는 시간이 길어지자 부모님도 혜정과 손녀딸들을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착수금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언제까지나 내 편이 되어 줄 것 같기만 했던 담당 변호사도 외도의 증거가 충분하지 않고 대출금을 제외한 순수 자산도 얼마 없으니 적장한 선에서 합의를 하라고 종용했다. 계속 질질 끌면서 감정 소모만 계속 하다가 결국 조정 이혼을 하고 말았다.
혜정은 지금 와서 생각한다. 만약 내가 흥신소 의뢰를 먼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과 대화를 시도 했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상상해 본다. 아이를 창과 방패 삼아서 남편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이혼까지 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혜정은 쥐꼬리 만한 재산분할과 생각보다 턱없이 적은 양육비를 받고 이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혼녀가 됐다.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챘으나 이혼을 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바로 앉아서 조용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타이밍이다. 혼자서 가정의 경제를 홀로 책임지며 아이를 키울 자신이 있는지를 보라. 여자들이 이혼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경제적인 부분이다. 아이를 핑계로 헤어지지 못하는 것도 사실 아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돈’에 대한 압박과 그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인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여기서 돈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면 오히려 더 감정을 배제한, 본인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혼 관련 여러 가지 사례를 정리하다가 문득 십수 년 전, 그러니까 내가 막 스무살이 넘겼을 때 찜질방에서 들은 얘기였다. 온도가 적절한 ‘소금방’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아주머니들 한 무리가 들어왔다. 결국 누구네 엄마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뒷담화로 이야기 꽃을 피우는 듯 했다.
얼굴에 수건을 덮고 있는 내가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 했는지 나의 존재를 그녀들에게 까마득히 잊혀 진 듯 보였는데, 얘기가 얘기 인지라 나도 자는 척 아줌마들의 얘기를 엿들었다.
그 중 한 아줌마가 이런 얘기를 했다.
“이혼 할 거면 몰라도 그냥 데리고 살 거면 현장 덮치고 그러는거 아냐. 몰라야 같이 살지 다른 여자가 있는거 눈으로 확인하고 뒷조사에서 사진 찍고 그러면서 어떻게 같이 살아. 덮치지말고 덮어두라고 해. 애들 봐서 같이 살 거면....”
가장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는 별 시답잖은 주제로 떠든다는 식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내 나이가 벌써 마흔에 가깝고, 외도 이혼을 경험하는 지인들을 볼 때마다 그 아주머니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어떤 상황이 와도 이혼을 후회하지 않을 거면 감정대로 이혼을 진행시키면 된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증거자료를 모으고 남편의 뒤를 쳐라. 그러나 그 지난한 소송한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한 번 이라도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결혼생활에 대해서 후회를 할 것 같으면 남편에게 시간을 더 주는 것도 방법이다.
3개월, 길다고도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약 100일의 시간 동안 남자의 불 붙은 외도는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달콤한 유혹에서 눈을 돌리게 되어 있다. 특히나 ‘진짜 사랑’이 아니라 미성숙한 어른은 약 100일 정도 되어서야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절대 뒷조사를 하거나 카드 내역서와 휴대폰 잠금 해제 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 남자의 심리 중에서는 모든 것이 발가 벗겨진 관계 (특히 본인이 얼마나 관계를 망쳐 놨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결과물만 있다면)에서 미래를 보지 못하고 그만 외면해 버리고 마는 회피성 심리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외도의 달콤함에 빠져서 현실의 감정에만 충실하고 미래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남편은 불행의 원인을 ‘맞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해서’라고 단언한다. 즉 나는 아무 문제 없는데 배우자가 문제여서 내가 외도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합리화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유효하다, 외도로 인한 2차 문제가 발생되기 전까지는. 미성숙 하다는 말은 어린아이와 같다는 뜻이다. 즉, 불륜녀와 죽고 못사는 불같은 사랑에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일상의 짜증함과 지루함을 겪에 될 것이다. 익숙함이 찾아오면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자신이 흔들어 놓은 편안한 일상이 무엇인지 깨닫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아이와 아이를 소중하게 키우고 있었던 아이의 엄마라는 존재에 뒤늦은 후회가 찾아오게 된다.
불륜의 유효기간 3개월, 분노와 비난을 누르고 조금 만 더 신중하게 기다리면 남편은 정도(正道)의 길로 돌아올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혼이 아니라면 감정적으로 대응을 할 게 아니라 돌아온 이후의 관계회복에 신경을 써야 할 기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