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만 부스 하나

어설프게 모난 부채의식

by 쓴쓴

한낮의 온도가 영하로 곤두박질하던 날이었다.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로 얼어가는 거리를 걷던 나는 한 사람과 운명적으로 조우했다.


잠깐의 시간을 내달라는 말이 약속시간에 늦은 나의 발걸음을 왜 늦췄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가만히 서서 얼어버린 입이 내는 딱딱한 발음을 시끄러운 번화가의 소음 사이에서 구별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유엔 난민기구에서 나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는 나에게 별 모양의 스티커를 내밀며, 난민들이 피난을 떠날 때 가장 우선하여 챙기는 것이 무엇인지 맞춰보라고 했다. 네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나는 첫 번째인 옷가지를 선택했다. 두 번째는 여권 혹은 신분증이었고, 세 번째에는 가장 많은 스티커가 붙어있었는데 음식물이었다. 네 번째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옷가지를 선택한 나에게 난민의 실태를 소개하려는 그녀는 '많이 추우신가 보네요. 옷을 골라주셨어요'라는 말장난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답은 2번. 그러니까 난민들은 옷보다 음식물보다 자신을 증명할 만한 것을 우선적으로 챙겨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어서 쉴 곳과 먹을 것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그 말을 듣는데 왜인지 마음이 불편했다. 난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기는 얼마나 처참한 경험일까. 고향을 등지고 나라를 떠나며 도착한 타국에서, 이방인 곧 '뿌리 뽑힌 자'로서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현실을 인정받으려는 과정은 상상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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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래전부터 조금씩 후원해 온 단체와의 결연을 끝맺었다. 한국에서 운영되는 여러 기구들의 후원금이 투명하게 쓰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해서였다. 한 달여의 고민 끝에 몇 년을 함께해온 결연을 끊으면서 마음이 시리는 결정이었음을 분명히 느꼈다.


해서 텅 비어버린 마음에 남겨진 아쉬움을 느낄 때마다 조금씩 모아진 돈을 좋은 프로젝트에 클라우드 펀딩으로 참여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유엔 난민기구에서 들려준 소식은 좋은 만남과도 같았다. 대단치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어쩐지 너무 많은 것을 누리는 것 같은, 어설프게 모난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약간의 후원금을 약속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나에게 춥지 않냐고 물어보았던 난민기구의 그 사람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감사 악수를 청했다. 주머니에 넣고 있던 따뜻한 손이 차가운 손과 만났다. 그제야 악수를 청한 이들의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길 위에 놓인 자그만 부스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