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체험
나는 겹친 세계나 다중 우주라는 개념이 판타지나 과학에만 등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의 숫자만큼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만큼 세계는 다양한 상(像)을 개념적으로 가진다. '여러 개의 세계'라는 말이 현실이라는 뜻이다.
지인을 통해 점자 체험교육에 참여하고 설문조사에 응했다. 삼십 분도 안 되는 짧은 교육에 임하면서 '다른' 세계를 경험했다. <DORR_Dot On Readable Read>에서 만든 도구로 수학 점자를 익히는 과정을 반복했다. 익숙하지 않은 행동을 되짚으면서 점자를 입력했다.
그 와중에 조금 불편한 생각이 떠올랐다. 시각 정보에 대부분 의지하는 지금의 세계가 누군가에겐 너무 불친절하겠다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현대인이 향유하는 문화는, 청각 혹은 촉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너무 복잡하고 위험하다.
일순의 착각이나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자명한 현실이다. 당신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상대가 발견해 내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보았다면 말이다. 혹은 내 손이 아닌 다른 이의 손을 빌려, 물건을 찾아본 경험이 있다면 당신에게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당신이 대부분 이해하는 방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들이 있다. 때문에 당신이 이해하는 세계와 그들이 알아차리는 세계는 대부분 겹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 들리지 않는 세계라고 하여서 없지 않다고 단정 짓는 행위는 게으르고 비겁한 처사다. 우리 각자는 서로가 감히 알지 못하는 세계 곳곳에 있다. 숨겨졌을 뿐, 스스로를 숨긴 적은 없다. 이 세계는 소수이기에 다수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못하기에 드러나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종종 자신도 모르게 타인이 '나'를 알아봐주기를,하며 소원을 품지 않는가.
알 수 없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데는 동의할 거라 여기겠다. 하지만 이러한 애매모호한 태도는 마치 문학을 쓰는 행위와 같은 모험이다.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상상하라는 말은 결국 쓸모없지 않을까. 실재가 아니므로.
그러나 나는, 실용 면에서 그러한다 해도 의미 있는 모험이라 생각한다. 현실적인 도전이기 때문이다. 상상은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는 행위로 이어진다. 새로운 대륙을 찾는 것처럼, 그곳에도 나와 당신이 느끼는 만큼 다채로운 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는 기대감으로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한다.
지구에 사는 우리는 평생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 지금은 달의 뒷면을 찍은 사진을 인류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호기심으로만 진행되어선 안 된다. 그리고 옛 유럽인들이 그러했듯이 새로움을 정복하고 개조, 개량하겠다는 정복의 개념이어서는 안 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나 보도블록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엘리베이터나 길바닥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세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자신이 살지 않는 다른 세계를 눈치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달의 뒷면을 보자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반절을 이뤘다고 본다. 달에도 뒷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시작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프랑케슈타인을 탄생시킨 메리셸리는 자신이 경험한 당대 여성의 삶을 '피조물'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소설이 SF소설의 선구자로만 평가되는 사실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문학과 과학이 다른 세계를 드러내었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실제로 발견하였던 것처럼 우린 세계의 다양한 상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손을 내밀 의무가 있다.
이것은 그들을 우리 세상으로 초대하거나 억지로 팔을 잡아당기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의 세상에 방문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야만 그들과 우리라는 말로 나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는 둘로 나뉘어 보이는 세계가 사람 수만큼으로 이루어진 각자의 세계인, 온전한 세계로 인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