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하루
가끔 사람이 그러하듯이 우울에 잠긴 사람도 운명을 믿을 때가 있다. 이건 운명이야, 라는 말에 붙는 확신이라는 이름의 감정은 대부분 기대감이다. 다만 우울이 가능한 감정에 포함된다는 게 큰 문제다.
이러한 운명론적 시각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신을 믿는다면 혹은 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반복되는 패턴을 굳이 찾아내는 이상한 습관을 기르기 때문이다. 의미를 발견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추적한다.
어제 보였던 그 숫자는, 오늘 내게 보였던 그 사람의 웃음은, 내일 다가 올 의사 면담 시간은 본인에게만 읽히는 무언가가 된다. 신빙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나름의 작법으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든다. 자기 파괴적이지만 않으면 참 좋을 텐데,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우울증 환자는 모두 작가다.
결국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학습된 무기력은 모든 것에 동기 부여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안 할 동기를 부여한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한 이 마음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 때문에 몸과 마음이 괴롭다.
몸이 피곤한 날, 하루의 시작을 무언가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생각한 날이면 밤의 시간이 두려워진다. 날이 저물고 저녁을 먹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야.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몸뚱이를 보며 슬퍼하고 초조해한다. 이 게으름뱅이야, 오늘은 일어나서 아무것도 하질 못했구나.
무엇을 해내야 한다는 자기 압박과 피곤한 정신과 육체가 느끼는 회의감. 이 양극단을 오가는 갈팡질팡의 게으름은 나를 어지럽게 한다. 그럴 땐 약이 답이다. 얼른 주무세요. 오늘의 '나'님. 그러나 내일이 오기까지 아직 너무 멀었다. 억지로 자정을 넘기려는 마음을 재우려 약을 삼킨다.
조용히, 그렇게 아무 것도 없는 조용한 하루가 느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