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쓴쓴 Jun 22. 2021

그간의 일기

삶은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4월 23일


얼마 전 마라탕을 먹었다. 마라탕 국물까지 먹는다는 검증이 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중국 속담까지 돌아다니는 마당에 자랑하려 올린 게 아니다. 그만큼 내 삶의 면면이 빈 해졌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다.


무엇이든 삶의 면면은 연동되길 좋아해서 행동이 빈 해지면, 생각도 빈 해진다. 마라탕을 이제 먹은 지도 거의 6개월 만이고, 이 사진은 그나마 최근의 일이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음식 사진은 풍경과 인물 사진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일시와 계절과 날씨를 가늠하기 어려운데, 나는 지나가는 풍경과 계절을 내 삶에 담아내지는 못할 망정 오랜만에 만난 향기에 감동하여 저 사진만을 올해의 거의 유일한 것으로 가진 안타까움을 말하려던 것이다.


이렇게 또 한 해가 갈까 무섭고, 이런 한 해를 모두 공유한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나고, 누군가는 마라탕이 무엇일까 하고 이런 해보다 더 어려운 하루를 지켜봐야 할 수도 있겠다 생각해서, 빈 하다는 앞 글의 표현이 이렇게도 또 빈하구나 싶었다.




5월 30일

한 가지 사건으로(이것을 개수로 셀 수 있는 것인가는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혼란했던 짧은 시기를 보내고 무엇보다 마음을 챙겨야겠다 싶었다.


삼십 년이 넘도록 정이 안 가는 배경만큼이나 다양하게 나타나던 내 앞의 풍경은, 이제 할 수 있는 것들의 선택에서 그친다. 요새 역시나 최소한의 해야 할 일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자신을 보니 꽤나 움츠렸었구나 싶고, 무슨 요령인지 읽을거리 하나에 살짝 고양된 호기심과 배움의 즐거움이 느껴져, 덕택에 조금 살아간다 다시 느낀다.


그래도 다른 것을 좀 알아보고 할 수 있는 차선책을 찾아놔야지, 몇 개(이것을 개수로 셀 수 있는가는 모르겠으나) 가지곤 안 되겠다.




6월 19일

슬픈 것들은 언제나 몰려서 온다. 몰리는 까닭은 슬픔에게 있는 자성과 같은 성질 때문이고, 슬픔을 만들어내는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을 슬프게 하는 사람의 존재는 무척이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또한 사람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사람들의 선택은 무척이나 나를 슬프게 한다.


기적을 바라는 일과 저주하는 일은 동일하다. 지나친 현실감이 주는 과도한 감각들을 덮으려는 부정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외면한다 해서 사라지지 않고, 부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울고, 분노한다. 그래도 슬픔은 채 가시지 않고, 화는 쉬이 사그라들지 못한다.


종국에 우리는 인간에게 봉사하지 않는 신을 소환하여 멱살을 잡는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되는 유일한 탈출구다. 그 사실이 무척이나 나를 슬프게 한다.




6월 21일

1년 중 가장 짧은 밤이 지나가고 있다. 오래된 관찰로 얻은 천체의 움직임에 관한 지식은 앞으로만 향하는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계획은 항상 다 지켜지거나 진행되지 않아서 불안과 우울을 동반한다. 나아가는 무언가에서 반복되는 순환을 이해하여도 여전히 복잡 미묘한 인간의 생애에 관한 최적의 표현은 웃음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광기이든 고통이든.




이전 03화 수상한 세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