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쓴쓴 Oct 20. 2021

시간은 계속 흘러

마치 먼 곳에서 부는 바람처럼

6월 30일(1)

최근에 읽은 소설 두 권이 모두 '진실'을 다루고 있음을 알았다. 추측하건대 작가들은 개인의 경험과 역사를 타인이 '진실로' 알아내고 이해할 수 있는가에 관하여 질문을 던진 것 같다.

진실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을 살핀 이 소설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단어가 무맥락적인 몰이해와 폭력을 동반할 수 있다고 각각 짚어낸다. 그럼에도 그려내는 방식은 조금 달라서 하나는 유머이고, 하나는 스릴러에 가까운 씁쓸한 반전이다.

모두 다 흥미롭게 읽은 소설이지만, 유머를 이용한 작품에 마음이 더 기우는 이유는 아마도, 아무리 가상일지라도 진실의 일면을 소개하는 방식에 달려있을 것이다. 세상이 비록 서로를 받아들이는 데 서툰 곳이라고 하여도 약간의 유머와 넉넉함이 있다면 수용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다고 하는,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에서 비롯된 것 같기도 하다.


6월 30일(2)

코로나가 시작되고서 처음으로, 종종 다니던 음식점을 엄마와 함께 방문했다. 밥을 먹으면서 우리 1년 만이지,라고 생각을 나누다가 신비롭게도 2년도 더 된 사건을 가깝게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어긋난 회고를 가능케 한 기억의 장소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도 요즘에는 놀라운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자유의 맛이었다. 오래 전의 여유인 듯 느껴지지만 최근의 추억으로 머무르는 이 생경한 불일치의 교차지점에서, 표현되지 않는 감사와 불평이 앞다투어 일어나는 중이었는데 그제야 무엇이 자유일까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7월 7일

날이 흐린 탓인지 속이 쓰린 탓인지 자연스레 우족탕이 떠올랐다. 처음 먹어본 게 고작 2주 전이고, 설렁탕과 다른 음식이라는 식당 벽면의 소개글을 읽고서야 이전에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소금 맛이다, 하면서도 두 번째 방문했던 날엔 '특'을 시켰다. 부려본 삼천 원의 욕심이었다. 조금 더 두껍고 길어진 고기 조각과 얇게 고아진 부위에 붙은 물렁뼈가 새롭게 가라앉아 있었다.

뚝배기 속 하얗게 끓어오르는 국물을 떠먹으면서 살살 아파오는 배를 문지르다가 창밖을 보았다. 비가 곧 올 것만 같았지만 우산을 챙겨 온 터였다. 따뜻한 것을 삼키고 또 천천히 흘려 넘기면서, 만약 돌아가는 길에 비가 온다면, 서두르지 않은 날의 흐린 날씨를 탓하기로 하였다.



7월 12일

구한다는 행위가 나타나는 장면 속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구하는 사람, 구해지는 사람, 구해지지 않은(못한) 사람.

'구할 수 있는'은 누가 정하는 걸까. 구하는 사람인가, 구함을 요청해야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 행위가 나타나는 상황의 조건인가.

우리 각자는 자신이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 때 언젠가 내가 구해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위에서 손을 내민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꽤 오랫동안, 당신이 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라고 종용해왔지 언젠가 구조 요청을 해야 할 사람이어도 된다고 안심시켜주지 않았다.



8월 6일

마음이 과거에 오래 묶이면 우울에 물들고, 미래로 오래 달리면 불안에 적셔진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과거와 미래가 두려워진 사람은 자신이 처한 현재에 갇혀있다는 생각에 먼 곳의 언어를 개발한다.

그것은 현재를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해서도 안 되는 먼 곳의 말이다. 다시 그것은 슬픔도 분노도 담아내지 못하기에 차가운 언어다. 오늘의 양식은 그 냉기에 식어가고, 목구멍을 통해 넘어가야 할 하루의 온기는 내일로 나아가질 못한다.



8월 7일

4년 전, 한 병원 로비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읽던, 봄의 기록.

[열쇠] - 도종환.


구닥다리이면서도 여전히 흥미로운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은 나에게 흥미보다는 괴로움으로 더 많이 다가왔었다. 모든 결과가 열려있다는 단언도 두려우나, 자유의지의 환상에 관한 주장은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생물학에 근거한 자아의 부재와 심리학이 말하는 자의식의 취약성. 거기서 더 확장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실제로 무한한 가능성이 아니라 골라낸 여러 선택지 안에서 강요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철학, 정치학, 사회학까지. 사실 이쪽이 더 끌린다 요즘은.

그 와중에 시인은 두드리라고 한다. 그건 기쁜 일이잖아. 희망이잖아. 왜냐면 언젠가 열릴 거거든. 정말 그럴까.

이게 자유의지랑 무슨 상관인가. 나의 선택 영역은 수많은 인식의 문들과 그걸 열 수 없는 무능력, 열 수 있는 기회의 열쇠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나를 괴롭게 하는 '대환장파티'라는 것을 예수도 알고 있었을까.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는 그 오래전 울림이 과연 지금도 유효한 것인지. 찾을 때까지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인간 세계에 몇이나 있는지. 언제까지 무얼 구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선각자는 오늘도 그저 나에게 그렇게 하면 그러리라고 말할 뿐이다.



8월 21일

하늘이 맑고 푸르렀던 어느 날.

운에 의지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지적하는 우리의 지성을 옹호하면서도, 어떤 운이 따라올지 모른 채 무작정 바랄 수밖에 없게 내모는 인간의 어설픈 여러 체계를 탓하다 보니 쉬지도 못하고 결국 진퇴양난에 놓인 나를 찾아내었다.

그 발견의 언덕 위에서 울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답답하기를, 마스크 때문에 수없이 몰려오는 가을의 바람을 도저히 맡을 수가 없었다. 후각의 상실은, 무엇보다 야외에서 냄새를 잃었다는 것은 너무 많은 기억의 빈약을 의미했다.

확률의 세계로 둘러 '쌓'인 흰 천의 막과 막연한 불안이 왜 이리도 닮았을까. 계산을 마친 답의 길흉화복을 점친다. 그러니 결정할 수 있는 힘은 이것뿐이다. 운명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할 때가 올지라도, 단단한 비탈길을 내려와 무른 평지를 오래 걷는 발걸음의 용기.



9월 27일

과학은 모든 것을 절대적인 존재의 의지로 받아들이려는 오랜 관성을 멈추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알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며 발전하였다. 그 과도기적인 어느 시점에 인간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그것은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모든 학문의 실용성과 가치를 판단하는 한 기준이 되었다.

한 달 전쯤 잠깐의 자유가 나에게 허락되었을 때 고인류학 전시회를 다녀왔다. 그것은 과거의 것이므로 시간의 흐름으로 다가와야 했겠지만 마치 먼 곳에서 실려온 것들처럼 보였다. 내가 디뎠을 어느 곳에서 그들이 숨쉬었고, 그들은 다시 그 땅 아래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관람객들에게 잠깐의 지적 유희가 된다. 우리의 낭만은 대체로 낙관이므로, 그러나 밝혀진 사실은 너무도 거칠다.

그럼에도 분명히 과학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나에게 도착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류라고 불릴 만한 어느 시점의 존재를 찾았고, 수많은 환경의 변화에서 죽어버린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에게도 3인칭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우리의 존재가 그리 잘난 것이 아님을 선포하는 일이었으므로.

고인류학을 포함한 과학은 우리의 미래를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해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는 정확한 값을 얻고 싶은 마음보다는 신뢰하지 못하는 의심과 낙관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가까이 지구의 사용기한이 다가왔다는 과학자들의 최근 보고에도, 우리 인류는 아직도 낭만적이니까.

예측된 값들이 가까운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의 지구는 그렇게 거친 곳이 아닐 거라 단정한다. 그러나 과학은 여전히 말하는 중이다. 지구는 여전히 둥글어서 떠나갈 먼 곳은 없으며, 호모 사피엔스가 손댄 현재의 지구는 호모 사피엔스의 존속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10월 8일

잘 차려진 정찬은 비록 자신이 구매한 것이라 하여도 앞에 놓인 음식에 감사하게 한다. 책정된 금액이 어떠하든 맛과 공기를 좌우하는 식당의 정성과 고민을 발견한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지불한다.

지불되는 것은, 그러기에 언제나 물리적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너머로 향한다. 그러니 매 순간 충실히 일어나는 진부한 노력들이 고스란히, 힘을 발휘한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여러 확률 사이에서 인과가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기꺼이 하였든, 혼신의 힘을 다하였든 간에 인간이 만든 파동은 어떤 형태로든 남게 된다.

한 사람의 생명이 꺼지고 긴 시일이 소요된 후 그 정체성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다소 견고한 울림이 얼마 전 있었다. 이것이 어떠한 모습과 방법으로 어디까지 전달될지는 알 수 없다. 바라기는, 지불되어 버린 많은 호흡의 시간들이 혼신을 다하지 않아도 되는, 다만 감사와 포용의 식탁을 마련해 주기를.



10월 12일

처음으로 학교에서 단독의 밥과 국을 식판에 받았을 때 내가 얻은 이만큼의 양은 과연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고민하였다. 일명 1인분이라 하는 그 양은 얼마여야 적당할까.

그제야 집에서 먹는 밥의 양을 보게 되었다. 별 의심 없이 주어진대로 먹던 쌀밥과 국물과 건더기의 양은 절대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도 얻었다. 즉 한 사람의 양(1인분)은 조절될 수 있다.

양을 고민하는 일은 주체적 삶의 가장 이른 시작점 중에 하나다. '먹을 만큼만 퍼'라는 선포에서 시작된 '1인분 결정권의 소극적 이양'은 나는 얼마만큼의 사람이고, 얼마만큼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안에 사회적 압박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를 양육해준 어떤 이의 결정으로 부여받은 1인분의 개념이 어느 날 나에게 주어지면, 우린 인간 세계에 펼쳐진 실존적 두려움을 마주한다. 욕망과 배움 사이에서 인간됨의 학습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죽는 날까지 인간됨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사실.

접시 위에 무엇을 올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매우 주체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일이다. 각자의 책임, 배움, 욕망, 두려움, 삶과 죽음의 결정권을 내 것이라고 끊임없이 되뇌는 일이다.

이에 식탁 앞의 실존적 선택은 나의 인간됨을 위하여, 누군가의 인간됨을 위하여 분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식탁은 1인분의 인간됨이 어디까지인가, 누군가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가진 것은 아닐지 고민하는 자리다.




이전 04화 그간의 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