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갈수록 살이 찐다는 사실과 나이와 체력, 건강, 달관, 자율성의 상관관계에 관하여 공감하였고 과거에 공유했던 장소와 만남에 관하여 몇 번의 확인 절차도 거쳤다.
그것이었다. 그것이 다였고, 아주 오랜 기다림을 설명하는 모든 것이었다. 대단하지 않은 것들을 통해 삶의 접점을 다시 찾아보는 일이 오늘의 시답잖은 대화였다.
그러나 언젠가 서로 너무 많이 달라져있더라도, 함부로 변했다고 말하지 않는 사이이기를. 비록 다 터놓진 못해도, 혹은 묵언의 지지일지라도 당신의 존재를 응원하기를.
11월 1일
무엇이 아름답다고 영원하다고 말할 수 없다. 아름다움에 속한 것들은 영원함과 연결되지 않았다. 영원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나, 아름다움은 영원할 수 없다는 말은 믿지 않으려 한다. 그저 다른 것이다. 우리는 단지 아름다우므로 영원해야 한다고 믿을 뿐이다. 영원하다면 아름다울 것이라 예측하려 한다. 가을은 갑작스러운 추위와 짧아진 낮을 알아차리는 존재에게만 저무는 계절이다.
그러나,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11월 7일
한때 자주 듣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나던 어제였다. 이제는 별 감정 없이 곡조나 분위기, 부르는 이의 감성에 젖어 몇 번 읊고 마는 노래들이 있다. 올해, 가을의 낙엽은 그런 노래를 떠올리게 하고, 차가운 바람을 타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주황빛 반짝임을 더욱 눈부시게 하였다.
삶의 결국은 행복을 좇는 것이 아닌가, 라는 나의 잠정적 결론은 얼마 전 다시 위기를 맞았다. 사람이라는 유기체가 생리학적 반응을 감정으로 인지하고 해석하게 된 이유는 그저 외부의 위험을 딛고 살아가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 앞에서, 행복감은 그저 수단이어야 한다는 당혹스러운 결론을 맞닥뜨렸다.
행복하려면 행복을 좇지 말라는 다소 선문답 같은 문장은 고심한대도 정답은 없을 것이지만, 어떻게의 쌓음이 왜라는 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여기고 부지런히 때로는 게으르게, 태어난 원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 겸손히 배울 수밖에.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 간다.
바람이 분다 시린 향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린다. 여름 끝에 선 너의 뒷모습이 차가웠던 것 같아, 다 알 것 같아. 내게는 소중해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11월 10일
사실 오늘 삼백안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그런 단어인가 싶었는데 구글링으로 뜻을 찾아봤더니 별 거 없었다. 눈의 흰 비율이 좀 더 크다는 점 말고는. 연관검색어에 관상이니 운명이니 사주니 이런 단어가 보이길래, 또 눈에 띄는 사람 뭐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진화인류학은 사람의 흰자위가 다른 유인원과는 달리, 뚜렷하고 더 넓은 이유를 협력하는 능력에서 찾았다. 유인원들은 실험자의 머리 방향 쪽을 쳐다보려고 고개를 따라 돌렸지만, 어린 인간은 눈동자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려 관심을 보였다.
흰자위가 있기에 사람은 마주 보는 이의 의도와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더욱이 배우가 담아낸 눈 연기에 감탄할 수 있음은 감사한 일이다. 이와 별개로 흰색이 더 많다는 까닭으로, 눈에 더 띈다는 이유만으로 정해진 명이나 좋지 않은 인상을 언급하였던 습관들은 소통에 인색한 게으른 인간의 일면을 보게 한다. 대화보다 어림짐작이 상대를 파악하는 데 훨씬 간편하고 수월하다.
문화로 남기기에도 아까운 진화적 유산이다. 선택압을 받아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협력할 수 있도록 진화한 인간 군집에서, 흰자가 더 많다는 이유로 눈총을 쏘는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인류의 조상들은 알리가 없었을 것이다.
11월 18일
문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유한하면서 무한을 표현해낸다. 우리는 좌표상 어느 지점에 고정된 문을 기준으로 하여 한쪽으로 펼쳐진 무한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가장 흔한 인공물 중에 하나인 문이 지면에 그은 선은 무한의 세계에 속하지 않다. 문은 무한이라는 허상을 빌려 영원이라는 착시를 일으킬 뿐이다. 너무 큰 것을 이해하기에 버거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편리한 장치인 셈이다.
문은 이미 그것으로 하나의 좌표가 되어, 고정된 지점이 없는 세계에 말뚝을 박아 무한에 가까운 커다람을 엿보게 한다.
문 너머의 문에 이르기 전에, 문들 사이에 드러나 벌어지는 사건들의 마당에서 인간이 작은 무엇이라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이다음에도 문이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문이 있다면 또 다른 마당이 있으며, 돌아오는 연말엔 다시 캐럴이 들릴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는 까닭이다. 그것이 작은 우리를, 너무 막연한 가능성으로 대표되는 큰 세계에서 어느 정도 안정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