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낯선 하루의 리듬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을 걷다
원래는 푹 쉬려고 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샤샤와 어울려 놀다 보니 괜히 붉은 광장에 가고 싶어졌다. 게임에서만 보던 크렘린 궁전이 떠올랐고, 가장 모스크바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다. 회색빛 공기를 가르며 걷던 중, 광장에 도착하기 전에 작은 가게에 들러 허기를 채웠는데, 너무 급하게 먹어서 무엇을 먹었는지도, 얼마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붉은 광장에 도착했을 땐 찰나처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냥 인파에 묻혀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목적이 있던 것도, 특별한 감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광장을 지나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걷다 보니 어느새 볼쇼이 극장 앞에 다다랐고, 얼마나 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극장 앞 벤치에 앉아 숨을 돌리며 건물을 바라보니, 예상과 달리 화려함보다는 담백한 색감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오래된 외벽에 묻어 있는 현실적인 낡음이 오히려 정감 있게 느껴졌다. 작은 정원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조용한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잠시 앉아 다음 행선지에서 머물 수 있는 숙소를 찾아보려고 여행 중 알게 된 ‘카우치서핑’ 앱을 열었다. 일반적인 숙박 앱과는 달리, 이곳은 집주인이 자신의 소파를 여행자에게 무료로 내어주는 방식이었고, 물론 다소 위험할 수도 있지만 현지인의 삶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낯선 도시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이곳 러시아에서 흐르는 시간 속에 조용히 몸을 담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도시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특별할 것 없는 오전이 조용히 흘러갔다.
셔터보다 빠른 밤
오후엔 숙소로 돌아와 사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러시아 여행객이 다가와 말을 걸었고, 그는 오늘 저녁 근처 공연장에서 열리는 미국 래퍼의 공연을 보러 왔다며 티켓을 보여주었다. 공연장이 숙소에서 걸어서 20분 거리라고 했고, 별일 없으면 함께 가보자고 했다. 나는 티켓이 없었지만, 공연장 근처의 분위기만이라도 사진으로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는 공연 전에 청바지를 하나 사고 싶다며 함께 가게를 찾았지만, 문이 닫혀 있어 결국 관광이라는 소득만을 남긴 채 공연장으로 향했다. 숙소를 지나 기차역을 지나쳐 10분 남짓 걷자 공연장에 도착했고, 그 주변에는 작은 상가들과 함께 창고를 개조한 듯한 공연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티켓을 내고 입장했고, 나는 공연장 밖에서 렌즈를 통해 주변을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을 피사체로 삼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우연히 공연 관계자를 찍게 되었고, 그는 내게 공연 티켓과 술을 건넸다. 그렇게 아무 계획도 없던 일정이 공연을 관람하고 촬영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으로 바뀌었다. 무대 위로 쏟아지는 조명, 터지는 비트, 흥분한 군중의 열기에 나 역시 조금은 들떴고, 그래서 어떤 사진을 어떻게 찍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사진을 정리해보니 엉망이었고, 흥분이 차분함을 압도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풍경보다 사람들의 얼굴에 더 많은 시선을 두었다. 각자의 비트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는 모습들은 말보다 선명하게 감정을 전했고, 공연이 끝나갈 무렵에는 래퍼를 직접 소개받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어지는 술과 음료, 즉흥적인 파티 속으로 나는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공연장의 이름은 WINZAVOD
짧은 재회
공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 서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막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는 짧은 인사였고, 나는 공연장 주소를 보내주었다. 한참이 흐른 뒤 무대가 조용해지고 군중도 하나둘 흩어질 즈음, 서호가 도착했다. 공연장 앞에서 마주친 우리는 짧게 인사를 나눈 뒤, 공연의 여운이 남은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그저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근처의 작은 술집을 찾았다. 공연장의 열기와는 전혀 다른, 붉고 그루브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낯선 음악이 흐르고, 낡은 테이블 위에서 잔이 부딪혔다. 아래층에서는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우리는 도시의 감상, 오늘의 우연,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의 조각들에 대해 말없이 취해갔다.
이 하루를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예상 밖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계획하지 않았던 흐름 속에서, 계획보다 더 선명한 장면들이 남았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에서, 익숙한 사람과 낯선 밤을 걷는 일. 그런 날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다. 그리고 나는 그 여운을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싶었다.
아주 짧은 일지와 찍은 사진 그리고 영상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는 일지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배낭 여행을 준비하는 모든 분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