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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 김 사장 Nov 14. 2019

비트겐슈타인의 찬사를 받은 추리작가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추리소설 광팬이었다. 그는 ‘스트리트 앤 스미스’에서 발행한 펄프 잡지 《디텍티브 스토리 매거진》을 즐겨 읽었으며 이 잡지로부터 많은 영감를 얻었다는 얘기도 한 적이 있다. 건강이 나빠져 더블린의 관광명소인 로즈에서 요양할 당시, 비트겐슈타인의 작은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제자 맬컴이 보내주는 미국의 대중 잡지에 실린 추리소설을 읽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우연히 마을의 한 상점에 들렀다가 노버트 데이비스라는 작가가 쓴 추리소설 <두려운 접촉Rendezvous with Fear>을 읽고 이런 평가를 남겼다. “나는 수백 권의 소설을 읽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마 두 권일 것이다. 그중 하나가 데이비스의 책이다.” 철학계의 슈퍼스타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던 탐정소설가라니 궁금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관절 노버트 데이비스는 누구인가. 


노버트 해리슨 데이비스는 1909년 4월 18일, 일리노이 모리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버트(Robert) 데이비스였고 그의 가문에 로버트란 이름을 가진 남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노버트의 부모는 전통에서 약간 벗어난 이름(노버트)을 아들에게 붙였다고 한다. 스탠포드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틈틈이 데이비스는 탐정소설을 썼다. 가난한 농촌마을 출신의 법대생은 어떤 계기로 탐정소설을 쓰기 시작했을까. 대공황 직후였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데이비스는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잔디도 깎고 차도 닦고 모래도 퍼 날랐다. 하지만 곧 자신의 몸은 노동하는 일에 맞지 않는다 여기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32년 6월, 데이비스는 펄프 잡지 《블랙마스크》에 첫 작품을 발표한다. 이듬해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그는 이미 《다임 디텍티브》, 《디텍티브 픽션 위클리》 등에 작품을 팔아 원고료를 받는 작가였다. 탐정소설을 쓰는 것만으로도 벌이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그는 변호사 시험을 포기하고 전업 작가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데이비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작품을 쓰며 여러 펄프 잡지 작가들과 교류했다. 이들의 모임은 ‘픽셔니어즈(The Fictioneers)’라는 이름이었고 스물다섯 명 정도가 이 그룹에 속해 있었다. 데이비스와 같은 동네에 살았던 레이먼드 챈들러도 모임에 나왔다. 데이비스의 작품에는 늘 ‘《블랙마스크》가 지향하는 터프함+스크류볼 코미디’가 어우러져 있었다. 그가 작품에서 구사하는 유머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과 챈들러를 사로잡은 매력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유머 때문에 데이비스는 ‘팔리지 않는 작가’로 분류되었다. 이 세계의 전설이었던 《블랙마스크》 편집장 조셉 T. 쇼는 “액션으로 질주하는 내 잡지에 데이비스의 유머러스한 작품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겨우 다섯 편을 제외한 다른 소설은 일절 잡지에 싣지 않았다. 그 시절의 하드보일드 작가들은 “터프가이 픽션의 성서인 《블랙마스크》에 작품을 싣기를 원한다면 유머러스한 요소를 죽여야 한다”는 조언을 듣곤 했다. 챈들러가 보여준 재치와 달리 엉뚱하고(whimsy) 우스꽝스러웠던 데이비스 식의 유머가 통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동료 작가들로부터 하드보일드 소설의 최고 전문가로 여겨졌음에도 대중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49년 7월 28일, 데이비스는 자동차 배기관에 호스를 연결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마흔 살의 일이다. 유언은 남기지 않았다. 죽기 직전 그는 암에 걸린 상태였고 아내는 유산했고 생활비가 없어 챈들러를 비롯한 동료 작가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고 작가로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한마디로 고독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당대에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만큼 좌절감도 컸다. 만약 데이비스가 살아생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찬사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제자 노먼에게 그의 주소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데이비스의 작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말해주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노먼은 끝내 데이비스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 평전』의 저자 레이 몽크는 노버트 데이비스가 죽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천재가 자신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하긴 죽고 나서 진가를 인정받은 작가가 어디 노버트 데이비스뿐이겠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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