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을 찾아보면 ‘투고(投稿)’는 이렇게 정의돼 있다. 의뢰를 받지 아니한 사람이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 실어 달라고 원고를 써서 보냄. 또는 그 원고. 나도 종종 투고를 받는다. 메일로 받을 때도 있고 프린트한 종이 형태로 받기도 한다. 직접 제본까지 마친 원고가 도착할 때도 있다.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는 장르문학만 펴내는데 의외로 건강이나 여행 에세이를 들고 출간문의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투고할 때 출판사의 성향을 파악하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쨌거나 북스피어처럼 작은 출판사에도 끊이지 않고 투고가 들어온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면 세상에는 책을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은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다.
다른 직원들은 한 달에 한 권 책을 펴내기 바빠서 여력이 없으니 투고를 검토하는 건 시간이 남아도는 내 몫이다. 다행히 나는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다. 하지만 지금껏 내 마음에 쏙 드는 원고를 발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끝까지 읽은 적도 거의 없다. 문장의 기본이 안 돼 있거나 유치한 표현이 반복해서 나타나면 도중에 읽기를 멈추고 만다. 도저히 읽을 기분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분이라고? 이거 너무 건방진 소리 아니냐고 열심히 투고한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그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일종의 직무유기다.
게다가 북스피어에서 출간한 소설의 문장 가운데 유치한 표현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분명히 있다. 심지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중에도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에세이에도 있다. 그런데 그 원고들은 어떻게 끝까지 읽을 수 있었을까. 그 원고는, 미야베 미유키(레이먼드 챈들러)가 썼기 때문이다. 당장 눈에 거슬려도 전체적인 완성도가 훌륭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투고를 읽을 때는 그런 인내심이 발휘되지 않는다. ‘신인의 투고에서 걸작을 발견할 수 있을 리 없다’는 편견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어서가 아닐까. 『82년생 김지영』이 출간되기까지 몇 군데나 되는 출판사를 거쳤다는 드라마틱한 소문에는 이런 식의 전개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이쯤에서 잠시 도리스 레싱이라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란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여 25년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인종차별과 여성의 권리문제에 대해 뼛속 깊이 고민했다. 영국으로 이주한 후로는 이런저런 사회 운동에 천착하지만 자신의 힘에 한계를 느꼈던 모양이다. ‘파리 리뷰’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좌절감 때문에 작가가 되었다”고. 서른한 살에 첫 번째 소설을 발표한 도리스 레싱은 분야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며 서머싯 몸 상, 메디치 상, 유럽문화상 등을 받는다. “전후의 가장 중요한 영국 작가”, “페미니즘 문학의 거장”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한국에는 2007년 무렵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알려졌다.
어느 날 도리스 레싱은 자신의 책을 출간한 영국의 출판사들에 소설을 투고한다. 이미 유명해진 후의 일이다. 이때 “젊은 예술가들이 어떤 식으로 취급당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혹은 “문학계의 기득권층을 탐구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제인 소머스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원고는 도리스 레싱의 출판 대리인이 이러한 사실을 비밀에 붙인 채 보냈다. 필자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여성 저널리스트로 소개되었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원고는 거절당했다. 그냥 거절 정도가 아니라 출판사의 검토자가 덮어놓고 깔보는 투였다고 한다. 도리스 레싱 전문가들에게도 원고가 전달되었지만 누구 하나 알아보지 못했다.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도리스 레싱은 말한다. “염두에 두던 대상은 출판사가 아니라 서평과 비평을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예측 가능하게 움직입니다. 그 책이 출판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전부 알고 있었어요. 제가 사실을 털어놓기 직전에 캐나다 텔레비전 방송과 인터뷰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했지요. ‘영국 비평가들은 그 책이 별로라고 말할 겁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정확히 예측한 대로였습니다. 불쾌하고 험악한 서평들을 받았지요. 그 와중에 다른 나라에서는 아주 잘 팔려나갔고요.”
정말로 멋진 실험 아닌가. 권위의 동굴 안에 오글오글 모여 있는 이른바 전문가들을 골탕 먹인 것이다. 이 대목을 읽고 나서 가끔씩 상상해 보곤 한다. 어느 인기 있는 작가가 무명인 척하고 자신이 쓴 필생의 역작을 한국의 출판사들에게 동시에 투고하는 거다. 그중에서 글의 진가를 알아보고 출간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선 출판사는 단 한 군데뿐. 지금껏 히트작은 없지만 소신 있게 책을 펴내온 곳이다. 책은 불티나게 팔리고 마침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작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실은 내가 이 책의 저자입니다”라면서. 그 원고가 나에게 온다면 과연 알아차릴 수 있을까. 아마 어렵겠지. 나 같은 야매가 어찌. 그건 그렇다 치고. 정말로 그런 실험을 한다면 어떤 작가 좋을까. 그런 쓸데없는 상상을 해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