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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 김 사장 Nov 15. 2019

범죄문학계 최고 거장의 죽음

스코틀랜드의 범죄소설 작가 필립 커가 2018년 3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 가는 데 어디 순서가 있겠냐만 재작년에 생애 첫 탐정소설 3부작을 완간하며 건재함을 과시한 스티븐 킹의 나이가 71세임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정확한 사망 원인도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다. 범죄문학계 최고 거장 가운데 한 명(옵저버)으로 추앙받는 이언 랜킨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필립 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그가 쓴 베른하르트 귄터 시리즈는 믿을 만한 도덕적 주인공이 등장하는, 근사한 스토리와 치밀한 조사로 이루어진 비범한 작품이다.” 


내가 필립 커의 사망 소식을 들은 건 토요일 오후였다. 모처럼 햇살이 좋아서 사무실 대청소를 하던 중이었는데 친하게 지내는 에이전트가 문자로 알려주었다.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베른하르트 귄터 시리즈를 펴낸 걸 알기에 신경 써준 듯하다. 나는 청소를 그만두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영어권 국가의 독자들이 소셜 미디어에 올린 애도의 글을 찾아 읽었다. 그의 소설을 도맡아 출간해 온 쿼커스 북스의 편집자가 올린 트윗도 눈에 띄었다. 나도 귄터 시리즈의 한국어판 편집자로서 뭔가 쓰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글’에도 형식이 있나. 모르겠다. 부고를 한번도 써본 적이 없으니까. 이럴 때 내가 곧잘 애용하는 방법은 잘 쓴 부고를 읽어보는 것이다. 에세이를 잘 쓰고 싶으면 잘 쓴 에세이를 읽으면 된다. 여행기를 잘 쓰고 싶으면 잘 쓴 여행기를 읽으면 된다. 한 권으로 어렵겠다 싶으면 여러 권 읽으면 된다.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읽지 않고 잘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계속 읽다보면 그럭저럭 잘 쓰게 된다는 것이 내가 터득한 왕도다. 


그래서 <함께 가만한 당신>을 펼쳤다. 스물네 살에 1인 출판사를 창업하여 65년 후에는 영국 독립출판의 지조라고 불린 피터 오언의 부고가 눈에 띈다. 그는 (1) 빼어난 감식안으로 까다롭게 작품을 고르고 (2) 웬만해선 절판시키지 않기로 유명했으며 (3) 비아냥거림을 들을지언정 동성애자 인권과 여성, 마리화나 같은 사회적 이슈가 담긴 도서를 선도적으로 출간함으로써 (4) 도리스 레싱으로부터 “그가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책들을 출판해줬고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무엇보다 “늘 어려운 형편에도 직원들 급여는 상대적으로 후했고 자신의 월급은 아주 적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 대목을 읽고 나서 문득 생각했다. 일면식도 없는 작가의 부고를 어떻게든 멋지게 써서 한 권이라도 더 팔아보려고 아등바등 할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직원들이 어떻게든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도록 급여를 후하게 주는 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뭐야, 이거 여우에게 홀린 기분인데. 잘 쓴 부고란 이런 거구나. 타인의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의 삶을 조망하게 만드는. 그런 부고를 쓸 수 있을 만큼 더 열심히 읽고 나서 필립 커에 대해 써야겠다. 아쉽지만 그렇게 다짐하고 작가에게 마음속으로만 인사했다. 안녕히. 좋은 소설을 써줘서 고마웠어요,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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