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의 소원

결혼식은 꼭 제주도에서 할게

by 곰곰

어릴 때부터 결혼은 하고 싶었는데 결혼식에 대한 로망은 없었다. 나에게 연애란 결혼을 생각하며 시작하는 관계였다. 좀 더 어릴 때는 왜 이렇게 결혼을 하고 싶나 했는데, 이제 정말 프러포즈를 받고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싶은 이유는 가족을 가지고 싶어서였다. 엄마와 할머니 나 구성원인 가족 말고도 엄마와 할머니가 없을 때도 내 옆에 남아있는 가족 말이다. 외동인 나에게 엄마는 항상 " 엄마랑 할머니가 없으면 너는 이 세상 이 하늘 아래 너 혼자야. 잊으면 안 돼."


이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던지 가끔 이 말을 생각하다가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 말고 가족이 필요했다. 가족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지만, 인간관계에 워낙에 욕심과 관심이 많은 나에게 친구로 가족을 이룬다는 건 쉽지 않았고 결혼을 통한 가족 구성이 나에게 적합했다.



지금 남자 친구와 결혼을 결심하고 나는 반지도 필요 없고 결혼식도 필요 없고 그걸 준비할 마음으로 우리 둘이 앞으로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마음에는 미국, 제주, 캐나다에 떨어져 사는 가족들을 다시 모아 식을 계획하는 일련의 스트레스를 뒤로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결혼을 하겠다는 말과 결혼식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결혼하려고. 근데 결혼식은 안하잰하맨"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사람을 만난 거 축하해. 엄마도 작은 결혼식 아니면 안 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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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런 쉬운 승낙이라니. 기대도 안 했는데 엄마는 의외로 축하와 함께 내 결혼식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고 했다. 나는 열 시간을 올라야 하는 산을 한 번에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삼일 뒤 엄마는 다시 전화가 왔다.


"너는 어쩜 미국 가더니 개인주의자가 다 됐다지만 어떻게 결혼도 통보를 할 수가 이서!!!!! 엉? 엄마는 흥 모르겠다"


그럼 그렇지. 쉽게 넘어가면 우리 엄마가 아니지. 엄마와 여러 번의 통화와 남자 친구와 엄마가 단둘이 두 시간 넘게 통화를 하고 나서야 원만하게 화해를 할 수 있었다. 통화하면서도 결혼식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제주에 와서 상견례를 준비하면서도 여러 번 확답을 받았다. 엄마는 자꾸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는데 아무리 봐도 엄마는 결혼식을 했으면 싶어 보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니, 네 그럼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죠 했다. 이모도 나에게 결혼식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한마디 하셨지만 나는 하고 싶지 않다고 웃었다. 귀는 두 개요 입은 하나인 엄마가 이모에게 한마디 거들라고 한 모양이지만 내 마음에는 미동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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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무언가가 자꾸 조그만 가시처럼 슥슥 걸리는 기분이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는 상견례까지 다 마치고 미국 비행기를 타기 이틀 전에야 알았다. 내가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이틀 남은 날 아침, 할머니는 그날따라 심통이 났다. 심통이 난 나머지 우셨다. 5주 동안 애가 마음을 바꿀 줄 알았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걸 보고 심통이 나신 걸까. 매일 나랑 엄마가 결혼식 이야기를 할 때 눈빛이 심상치 않았는데 그건 할머니의 소원이었다. 열심히 키워 놨더니 밖에 나 가사는 손녀딸이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


아.. 결혼식을 왜 안 하냐며 한 마디씩 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웃으며 "하하 저는 원래 할 마음이 없었어요"라고 가볍게 받아쳤는데 할머니의 소원만은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우리 할머니는 나 18살 때 갑자기 찾아온 뇌졸중으로 집 밖에 못 나가고 계신다. 내 마음은 엄마도 할머니도 계속 건강하게 오래오래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사람일은 모르지 않는가. 그런 할머니의 소원을 모른 척할 수 없다. 아 그럼 결혼식을 해야지. 제주도에서 해야지. 할머니는 비행기를 못 타시니까 캐나다도 미국도 서울도 후보가 될 수 없다.


제주도에서 꼭 결혼식을 해야겠다 라고 마음을 먹고 비행기에 올랐다.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결혼은 나랑 내 남자 친구가 하는 게 아니라 가족들의 협상과정이라 던데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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