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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Sep 24. 2015

가면의 생Pseudo - 에밀 아자르

고백Aveu

당신의 고백....


가면의 생Pseudo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는데, 담담한 필치로 인생의 기미(機微)를 포착하고 은근한 유머를 담은 그녀의 작품은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높이 평가되었고, 영국의 한 여류작가로 머물지 않고 세계 문학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 제인 오스틴 -

내가 좋아했던 제인 오스틴, 그녀가 42세 떠나기 전까지 더 많은 작품을 남겼다면 나는 아마도 다 찾아서 읽었을 거다. 샬롯, 에밀리, 앤 브론테 자매들이 더 많은 작품을 남겼다면 아마 다 찾아서 읽었을 거다.... 나의 한 시절을 그렇게 그녀들에게 푹 빠졌었다. 그리고 여러 작가들을 만나고 독서를 해왔지만 그런 끌림이 내 마음에 들어찬 경우는 없었는데 다시 한번 돌아왔다.
 


붉은 전등갓 아래에서 공허한 언어를 가득 실은 배가 심연을 찾아 떠돌다가 실린 화물의 무게에 눌려 잔잔한 수면으로 떠올랐다. (p169)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오면 어떤 영감으로 그런 작품을 쓰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오래도록 남았다. 나는 로맹 가리의 또 다른 가명 에밀 아자르가 쓴 <가면의 생>을 읽고 있다. 그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도 이해가 될 때까지 무심하게 읽기 시작했다. <솔로몬 왕의 고뇌> <별을 먹는 사람>을 읽다가 덮기를 여러 번 끝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에 읽기를 바라고 아껴두었던 책이었다. 나는 읽은 책의 끄트머리를 꼭 붙잡고 있길 좋아하는데 얼마 전 <하늘의 뿌리>를 읽고 아직 그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있다. TV를 보다가 코끼리떼를 보면 그가 옹호했던 것을 떠올리게도 되었다....
 
 
<가면의 생>에는 가상의 존재 크리스티안센 박사와 통통 마쿠스가 등장한다. 에밀 아자르를 탄생시킨 로맹 가리가 그의 아버지이자 삼촌이며 그에게 DNA를 준 당사자이며 그의 은신처가 되어준다. 로맹 가리 자신이 크리스티안센 박사와 통통 마쿠스이며 아자르와 정신적 대화를 나눈다. 아자르를 설득하고 그에게 에밀 아자르가 되어 글을 쓰고 자신을 비우고 그만 불평하라고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어책이었고 첫 자가치료의 산물은 <그로칼랭>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비워 낼 다른 주제를 찾는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주제였던 <자기 앞의 생>을 책으로 써낸다.

나는 하나의 허구일 뿐이라고 말해준다. 외부적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징후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문학작품을 통해서일 뿐이다.(p24)
나는 늘 유전에 대한 공포, 탄생에 대한 희망 그리고 내 인간적인 성향에 희생당해왔다.(p105)

** 크리스티안 10세
1912년 5월 프레데리크 8세(Frederick VIII)가 사거하고 덴마크 왕으로 즉위하였다. 글뤽스부르그(Glücksburg)가문으로서 세 번째 덴마크 군주가 된 것이다. 나치(Nazi)의 점령에 대항하여 국가의 독립의식과 저항의식을 심어주어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왕으로 부각되었다.
**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
프랑수아 뒤발리에(Dr. François Duvalier, 1907년 4월 14일 ~ 1971년 4월 21일)는 아이티(Haiti)의 대통령이자 정치가, 의사, 문화인류학자였다.
그가 아이티의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964년부터 1971년까지 현대에서도 보기 드문 최악의 독재정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가 만든 비밀경찰인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는 국민을 공포에 빠뜨렸다.
 
 
 
로맹 가리(아자르보다는 로맹 가리라고 생각했다)의 의식 주변엔 언제나 그의 등장인물들이 모여들어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부르고 불리길 바란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자신을 허구로 여긴다. 보통은 그와 반대인데.. 이해하기 참 어려웠다. 그의 정신세계는 나약한 것들의 절규와 절망 그것의 울부짖음이 있었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고 길들여져 있는 익숙해진 것에 대한 이야기를 그는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실뿐인 하나의 이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 했다. 그의 광기 어린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자기 자신의 저자나 작품이 될 수 없는 한 과거에도 현재에도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p77)



세상의 무게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고 말한다. 그는 다른 무게를 짐어지고 있었을게 분명해 보였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무게까지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가면의 생 - p136)


 
로맹 가리의 가명 에밀 아자르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칠수록 점점 더 인간과 비슷해져갔다.  실제 인물로 자신의 사촌을 내세운다.  자신의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한 코와 입이 있는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 엉성한 증거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그로칼랭>으로 1974년 문학 상이 결정되는 날 아침, 모든 상의 후보에 사퇴한다고 편지를 쓴다. 정체를 숨겨야 했다. 이후 그때 일을 후회했다고 말한 기억이 나에게 있다. 에밀 아자르는 <자기 앞의 생>으로 문학 상을 받는다. 로맹 가리는 그의 삶을 인정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었다...


나는 약한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내가 지면 질수록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더욱 괴로워진단다. 내 약함을 가지고 그들을 내부에서부터 뒤흔들어놓지. 그래서 그들은 지극한 겸양을 얻게 되는 거야. 자위행위 같은 건 해선 안돼, 모모. 왜냐하면 그건 교활한 간계 거든. 그걸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째서 인간이 죄인인지를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고 말아. (가면의 생 - p85)
 
 
아자르는 커지는 공포의 실체에 피노체트(칠레의 군부 독재자)의 얼굴, 학살자의 머리를 달아두고 재료로 만든다. '인간적 고문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그가 발버둥 치고 악을 쓰며 찾아낸 것은 악행의 공간이다. 그 응급 범죄에 인간의 이름을 붙이고 무서운 협박을 받아 주위의 것들을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가 어떤 무게에 짓눌려 주인공을 만들어낼지 짐작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인간적 성향 때문에 스스로 희생되었다고 말한 것일까....

나에게 문학은 건강에 이로운 배설 행위라는 것이다. 나는 현실을 비워냈고... (p118)
함구하는 이유... 언어가 일단 발음되고 쓰이면 출구와 비상구를 메워버리고 확실성이라 불리는 창살을 창에서 떼어내버리기 때문이다.(p118)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 대한 로맹 가리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또 그가 기억하는 새끼 고양이의 죽음(죽인 일)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잊어버리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중학생 때 일이 생각났다. 난 어린 마음을 이용해서 선생님을 이용했었다. 내가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이후에 난 그 선생님을 잊었고 이후에 어느 자리에서 만났을 때 외면받은 기분을 느꼈었다. 내 마음은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었고 그것은 전해졌던 거였다. 지금에 와서 그때 일이 생각이 났다. 위대한 작가의 죄의식.. 누구에게 죄를 사하여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흠, 알다시피 주제에는 우열이란 게 없지. 중요한 건 그것을 다루는 방법이고 재능이야. 죄의식, 하늘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 되는 '아버지'...... (중략)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훌륭한 책을 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니? 나에 관해, 너 자신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하렴. 나는 너를 믿는다.(p170)


 
읽는 동안 로맹 가리는 사라지고 에밀 아자르만이 남아있었다. 처음부터 <가면의 생>은 아자르 자신의 삶이었다. 그는 자신의 출생증명을 끊임없이 보여주려 애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조작된 존재이며 스스로 비단뱀이 되었다가 어딘가에 덜 소속되기 위해 책이 되었고 자신에게서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나 아닌 존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로맹 가리 자신의 진심을 말해주는 듯했다. 로맹 가리는 아자르로 하여금 현실 속의 어떤 틈을 찾게 만들었고 마음의 취조를 피하기 위해 그 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고도 말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공된 존재가 아닐까.(p152)

 
 
크리스티안센 박사와 통통 마쿠스의 이름으로 알 수 있었듯이 그의 핏속엔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 겁주는 자와 겁먹는 자, 짓밟는 자와 짓밟히는 자가 공존한다. 정신분열과 피해 망상은 그가 할 수 있는 세상의 균형이었다. 고 말한다. 처음부터 내가 <가면의 생>을 읽었더라면? 분명 미치광이쯤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아니면 결코 읽어선 안될 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말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를 생각했다...

"문학에서 모든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은 언제나 부분일 뿐이지. 한 권의 책에서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건 초심자의 생각이야. 경험 부족에서 나온 거지."(p168)

 
 
 로맹 가리는 자신의 분신이 자신과 마주하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을 증오하고 그 추함마져도 똑같이 비춤으로써 더욱 고통받았다. 이것이 가능한 것인지 따져 묻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만 같았다.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거대한 집착 속에 생성과 구원에 대한 한계없는 절박한 욕구와 비루함과 과대망상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나는 종종 리뷰를 쓰면서 정리되고 이해되고 있다. 완전한 이해없이 쓰면서 이해하고 있어서 신기할 정도다. 아자르는 회복이 불가능한 존재이며 자신의 허무를 다룬 걸작을 만들어낸다.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위해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거예요.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진정으로 찬란하게 존재하는 거죠.(p176)


 
에밀 아자르의 마지막 외침은 고통없는 창작이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작가는 없고 작품만이 남았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는 이 책이 자신의 마지막 책(1976년)이라고 했지만 1979년 <솔로몬 왕의 고뇌>를 내놓는다. 무슨 심경의 변화였을까 그가 한 마지막 책이란 말 한마디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렇게 사라졌을 아자르를 떠올렸다.
**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책이었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작품에 담긴 재능인 것이다.
나는 스스로 멋지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순결하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질서에 부합한다고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을 프랑스에, 인류에 헌정했다. 인류는 나에게 자신의 고통을 주었고 그 대가로 나는 한 권의 책을 주었다. 우리는 서로 비긴 셈이다. 빌어먹을, 문학은 우리 모두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그가 40년동안 이 작품을 품어온 까닭은 나도 궁금했고 이 책을 통해 어느정도 느껴졌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번역가 김남주는 도저히 해결 안되는 단락이 있어 저승에 있는 로맹 가리에게 편지라도 써서 물어보고 싶다고 한 말이 이해가 될 뿐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태양이 빛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의 발견에 의하면 그 문제가 다시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영국과 소련 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태양은 아주 거대한 심장처럼 뛰고 있는데 그 원인은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다......'(p217)


이전 17화 다시 되돌아본 <자기 앞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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