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소송>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난다.
당신은 체포되었을 뿐이오. 그게 전부요.
나는 당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고,
또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하며, 물론 일시적이기는 하겠지만
우리는 이제 헤어질 수 있습니다.
당신이 체포된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장에 나가 일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습니다.
당신 일상생활도 방해받지 않을 겁니다.
율리우스년은 시간의 단위로, 365.25일(31,557,600초)이다.
율리우스년은 천문학에서 주로 천체의 공전 주기를 나타낼 때 쓰인다.
1광년은 진공중에서 빛이 1율리우스년동안 간 거리이다.
100율리우스년을 1율리우스세기,
1000율리우스년을 1율리우스밀레니엄
또는 1율리우스천년기라고 한다.
<사인Sin과 다면체와 별과 패턴>
K는 계속 창가에 있었다.안마당은 조그만 사각형 모양이었다.안마당을 돌아가면서 사무실들이 들어서 있는데, 창문들은 이제 모두 컴컴했고 맨 위층의 창문들만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K는 애써 컴컴한 마당 한쪽 구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거기에는 손수레 몇 대가 서로 맞물린채 모여 있었다.
K의 창가, 마당 한쪽 구석 손수레 몇 대, 또다른 건물 맨 위층 달빛받아 빛나는 창은 삼각형 모양의 단면을 그린다.두 개의 쇼윈도 사이에 난 비어 있는 벽의 일부처럼 느낀다.
커다란 창문 두개를 통해 들어온 달빛이 바닥에 있는 작고 네모난 두 개의 면을 비추고 있었는데, 방 안에는 묵직하고 오래된 가구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들이 내려다 본 그 자리는 K가 욕망을 품은 레니와 함께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인 것이다.
<불과 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것'은 이쪽과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위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읽기가 불가능한 지점'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그 언어 속에 거주하면서 그 언어를 끊임없이 다루고 다스리는 무언가와 같다.
우리 모두 구해줄 수 없다면 적어도 나만이라도...
출구가 어디죠?
여기가 출구라고 수없이 말해줘도 꼼짝도 하지 않더니..
출생증명서를 들고 방 한가운데 서서
계속 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카프카의 세상>
자유는 무한하지만 그만큼 무력하다. 사생활을 보호해 주는 비밀 따위는 없고 우리는 더 이상 비밀 요구조차 않는다. 사생활은 더 이상 사적이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람 대 사람의 대립이 아니라 사람 대 행정으로써 대립된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다. 소송은 길어지고 삶은 갑작스레 끝이 난다. 자신의 의지 없이 무관하게 모험에 이르렀다. 행정의 실수, 기계의 오류, 예측 불가의 결과뿐이다. -밀란 쿤데라 <커튼> 중에서 -
카프카의 세계에서는 독창성이 없어진 관료체제, 기술, 역사 같은 도구에 불과한 세계를 반시적인 세계로 개조했다. 개인의 자유를 위한 자리이다. 잠깐 열리는 창문, 금방 다시 닫혀 버리는 창문들이 있을 뿐이다. 그 창을 통해 어떤 빛, 바깥의 세계, 하나의 가능성, 한 가닥 은빛을 보내는 시詩가 있다. - 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 -
카프카는 예언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봄(見)이 미리 봄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 했다. 그에게는 사회 체제의 가면을 벗기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실제 사생활을 통해 알 수 있게 된 메커니즘을 조명했던 것이고, 훗날 역사의 흐름에 의해 이 메커니즘이 커다란 무대 위에 올려지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
카프카 소설은 시적이고 자유로운 모든 상상력에 열려있다. 쿤데라는 그의 한 문장이 환상으로 빛나고 놀랍다며 감탄스러워한다. 그는 카프카의 '소설이라는 시'가 서정성과 관계있고, 작가의 고해며, 작가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인다고 느낀다. 그 마술적인 세계는 모든 현실적인 동시에 비개연적이고 작가의 주관적 세계다. 소설의 방향은 장면이 기본 구성요소를 가지며 자유로운 환상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카프카의 <소송> 주인공 요제프K
영문도 모른 채 체포당한다.
분별 있는 단 하나의 태도는 상황에 적응하는 것.
요제프 K는 결국 개죽음을 당할 터인데.
마치 그는 죽어도 모멸감은 살아남듯이...
더 이상 이름을 가질 권리가 없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누구인지 모른다.
의식이 방황하는 그런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수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된다.
그곳, 그들을 기다리는 건 죽음뿐.
- 나의 삶인가? 아니면 연극인가? -
죄와 벌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와 일치한다.
인간이 감수하는 벌뿐만 아니라 4만 년 전부터(즉 인간이 말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인간을 상대로 끊임없이 진행되어온 재판 또한 사실은 말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을 취한다'는 것 스스로와 사물들의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스스로와 사물들을 알고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죄와 벌의 구속력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지상의 모든 법률 조항들 가운데 최후의 법령은 이런 식으로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언어가 곧 형벌이다.
언어 속으로 모든 것들이 돌아가야 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죄의 분량에 따라 쇠해야 한다"
재판이 하나의 '신비'라면, 이 위로받을 수 없는 신비는 다름 아닌 이들의 제스처와 행위와 말들의 복잡한 그물망 안으로 죄와 벌을 모두 끌어당긴다.
구원도 속죄도 없는 신비,
그 안에서 죄와 벌은 인간의 존재 속에 고스란히 체화된 것으로 나타나고, 신비는 반대로 인간에게 어떤 초원적인 지평이나 이해 가능한 어떤 의미도 제시하거나 부여하지 못한다. 신비는 포착 불가능한 제스처와 고유의 과정과 비밀스러운 공식으로 존재할 뿐이지만 이제는 인간의 삶과 너무 가깝게 밀착되어 있어서 삶 자체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초월적인 것에 대한 어떤 어렴풋한 인식도 어떤 종류의 정의 실현도 허락하지 않는다.
재판은 항상 진행중
인간이 인간적으로 변한 뒤에 비인간적으로 남는 일을, 인간적인 차원에 들어섰다가 벗어나는 일을 결코 그만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사실상 인간적이면서도 아직은 인간적이지 못한 존재의 신비, 동물적인 또는 더 이상 동물적이지 않은 존재로서의 신비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한, 그가 판사이면서 동시에 죄수로 등장하는 재판의 판결문은 결국 증거가 충분히 명백하지 못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할 것이다.
<불과 글> p26-35 중에서...
달빛에 반짝이며 출렁거리는 강물이
작은 섬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갈라져 흘렀는데,
섬 위에는 교목과 관목의 낙엽더미가 눌러 다져지는 것처럼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낙엽더미 아래에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안락한 벤치가 있는 자갈길이 나 있는데,
K는 여름이면 여러 차례 그 벤치에 와서
몸을 쭉 펴고 앉아 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