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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Feb 17. 2024

다시 읽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그보다 더 큰 슬픔이 담긴 생각과 이미지를

머릿속에 차근차근 쌓아가는

습관과 광기가

항시 존재해온 유서 깊은 왕국에

나는 거주 한다.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고 써온 나라에 사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독서로 인해 영원히 내 잠을 방해받고

독서로 인해 섬망증에 걸리기 위해서다.


작업을 하면서 어쩌다 읽게 된 책들

그 안에 든 사고의 기름으로

내가 날마다 영원한 야등을 밝히는 책들

이제 집으로 가져간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단단히 사리고 똬리를 튼 내 몸은

겨울철의 새끼 고양이나

흔들 의자 나무틀 같다.


(1장 11,18p)




살아있기에 글을 썼던 실존 기록자, 작가 보후밀 흐라발 Bohumil Hrabal(1914-1997)




너무 아름다워서 죽을 때까지 다른 것에는 귀기울일 수 없게 만드는 선율이랄까.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그 무렵의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몹시 갈증이 나서

우선 지하실로 뛰어들어

응고된 우유가 든 차가운 단지를

양손으로 땅바닥에서 들어올렸다.


우유를 정신없이 들이켜는데

난데없이 두 개의 눈이 보였다

목이 너무 말라서 계속 마셨는데

두 눈이 다시 나타났다.


한밤중에 터널 속을

달려오는 기관차의 전조등 불빛 같달까

그 순간 살아 있는 무언가가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는 버둥대는 개구리 다리를

잡아당겨 정원에 내던진 뒤

침착하게 우유를 마저 마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엄마가 죽었을 때

내 안에 모든 것이 울었지만

막상 내게는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화장터를 나서자 한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책들을 두고 하는 일을 거기서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신 네구를 태운 참이었고

그 가운데 엄마는 세번째였다

장의사 인부가 뼈를 추려 곱게 갈아서

어머니의 마지막 유해를

철제 상자에 담았다.


그 순간 머리속에는 칼 샌드버그의

시구만 맴돌았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燐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


어느 화창한 여름날

내 엄마는, 무라면 사족을

못 썼다는 것을


유골함을 연 뒤 무밭에

엄마의 재를 뿌렸고

우리는 그 무를 맛있게 먹었다.


(2장 24-25p)





출처 @ TooLoudASolitude




시궁창을 철벅이며 걷다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제껏 한 번도 보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불쑥 시야에 들어온다.





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 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나는 복수를 할 요량으로

첫번째 꾸러미에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가 쓴 『우신예찬』을

두번째 꾸러미에는

실러의 『돈 카를로스』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 말씀이 피가 흐르는 육신이 되도록

세번째 꾸러미에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에케 호모』를

활짝 펼쳐서 넣어 두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미래로의 후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여름밤의 떨리는 미광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고

달의 형태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우정

영원으로 형성된 고도의 감각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전쟁이 끝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에

나는 마당에서 연을 태웠다

더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어린 집시 여자가

반짝이 종이로 장식했던

긴 연꼬리와 연줄도 함께.


빵을 성체처럼 쪼개고

그런 다음에는 난로와 불꽃과

열기 타닥타닥 타오르는 감미로운 불길을 보며

명상하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던 여자.


(5장 70-71, 84-85p)








평생에 걸쳐 내 안으로 스며들었던 텍스트들과 내 모든 사고도 함께…
내 삶이라고 해봐야, 작은 생쥐 한 마리만도 못하긴 하지만…




해가 서서히 저무는

호박색 하늘과 늘씬한 전나무들을 배경으로

내 앞에 천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는 정신적인 사랑밖에

줄 수 없게 된 그가 그녀가 죽으면

저 천사가 관의 누름돌처럼

그녀의 무덤을 장식하게 될 거라고.


마지막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우리의 러브 스토리 그 날개는

멀리멀리 사라지게 만들었다.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 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온 내가.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는 힘주어 책을 품에 안았다

우리는 제대 위에 꽃줄로 매단

커다란 두 천사의 날개 아래 피신해 있었다.


(6장, 100,104p 7장 108,111p)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내게는 이제 시간이 있다

난 분명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저 눈만 감아도 모든 게

현실에서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니까.


난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바니타스 바니타툼(헛되고 헛되니)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야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블타바 강의 바람이

카렐 광장까지 불어온다

공원 냄새, 싱그러운 풀과 나뭇잎 냄새가

강물에 실려와 이제 도로 위에 떠돈다.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는 나는

이곳저곳을 떠돈다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머리 위에 펼쳐진 별이 총총한 하늘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생쥐의 눈 깊은 곳에서 발견한다

그 순간 내 어린 집시 여자가

선잠에 빠진 나를 찾아온다.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

내 책이 손에서 떨어져내린다

폐지가 가득한 압축통 속에

나를 위한 작은 은신처를 마련한다.


나는 똬리를 틀고 살핀 다음

무릎을 꿇은 자세로 녹색 버튼을 누르고

완충물인 책과 폐지 속에서 몸을 웅크린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에 지복至福의 미소가 떠오른다.


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그 순간 내 집시 여자가 보인다

끝내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어린 여자

우리는 가을 하늘에 연을 날린다

일론카

그렇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8장, 120, 127, 131-132 p)




**

이 책은...

압축할 수 없는 그런 책


'체코 소설의 슬픈 왕’으로 불리는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

마흔아홉 살이 되던 해

뒤늦게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프라하의 봄’ 이후

1989년까지 정부의 검열과 감시로

자신의 많은 작품이

이십여 년간 출판 금지되었음에도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았던 작가라기보다

살아 있기에 글을 썼던 사람이며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실존 기록이다.


책에 바치는 오마주

책이 있기에 살 수 있는 사람

사라져가는 것들,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일깨워준다.

소멸하는 것들을 직시한다.


흐라발 자신이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책

너무 시끄러운 고독

그가 세상에 온 건 이 책을

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10-11p)

- 보후밀 흐라발 -




살아있기에 글을 썼던 실존 기록자, 작가 보후밀 흐라발 Bohumil Hrabal(1914-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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