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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Oct 03. 2015

로맹 가리 '결전의 날'

Gary '태워 버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러시아어

로맹 가리 Romain Gary
프랑스의 소설가. 시대정신과 풍속 묘사로 현대문명의 퇴폐성을 신랄하게 고발, 풍자성으로 일관된다.

  



가리(Gray)라는 필명은 '태워 버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러시아어라고 한다. 본명은 로맹 카체브(Roman Kacew).  1914년 5월 8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무명 연극배우 니나 카체브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유태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피해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지로 이주하였고, 13세 때부터 프랑스 니스에 정착해 성장했다. 1934년 파리 법과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했으며, 이듬해인 1935년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1935년 2월 15일 단편 <폭풍우>가 문예지 《그랭구아르(Gringoire)》에 당선되며 문단 데뷔
1945년 첫 소설 『유럽의 교육』이 비평가상
1946년 『튤립』
1949년 『거대한 탈의실』 OR 『거대한 옷장』
1952년 『낮의 빛깔들』 OR 『서정적 광대들』
1956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
1958년 미국에서 『레이디 L』(프랑스판 출간은 1963)
1958년 포스코 시니발디라는 가명으로 『비둘기를 안은 남자』: 유엔의 비판..
1960년 『새벽의 약속』
1961년 『조니 퀘르』
1962년 외교관직을 사직 후 단편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1962년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1965년 『스가나렐을 위하여』
1966년 『별을 먹는 사람들』
1967년 『징기스콘의 춤』 OR 『칭기즈 콘의 춤』
1968년 『죄지은 머리』 OR 『죄지은 축제』 OR 『죄인』
1969년 『게리 쿠퍼여, 안녕』
1970년 『흰 개』
1971년 『홍해의 보물』
1972년 직접 쓴 시나리오 『킬 Kill』
1972년 『유로파』
1973년 『마법사들』
1974년 『밤은 고요하리라』
1974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그로칼랭』
1974년 샤탕 보가트라는 가명으로 『스테파니의 얼굴들』
1975년 만년에 이르러서는 『이 경계를 넘어서면 당신의 승차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공쿠르상을 받은 『자기 앞의 생』
1976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가면의 생』 OR 『가짜』
1977년 『여자의 빛』
1978년 『영혼 충전』
1979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솔로몬 왕의 고뇌』
1979년 『서정적 광대』
1980년 『연』
1980년 파리에서 권총 자살
1981년 7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1983년  『비둘기를 안은 남자』 최종본 출간
1995년 1958~1970년 영어로 쓴 산문집 - 『프랑스였던 그 사람에게 바치는 시가』 프랑스어로 번역
1995년 1977년 르 몽드에 게재된 『불가능한 일의 정복』 출간
2005년 『마지막 숨결』 - 미완성 유작 발표                                    


                                                               

                                  

진 세버그, 사랑했던 그 기억으로... 그녀를 놓아주었으리라...  




              



1959년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 감독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의 여주인공으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아이콘이었던 미국 여배우 진 세버그(Jean Seberg, 1938~1979)를 만나게 되었다. 진 세버그와 동거를 시작하며 레슬리 블랜치와 이혼한 로맹 가리는
1961년 외교관직을 사임했다.

1963년 49세의 나이로 24세 연하의 진 세버그와 재혼한 그해 7월 아들 알렉상드르 디에고 가리가 태어났다.

1968년 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로맹 가리가 각본ㆍ연출을 맡고, 아내 진 세버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1968)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외설적인 내용으로 상영 금지 처분을 받고, 진 세버그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 미국에서 급진적인 흑인 인권운동에 참여했던 진 세버그가 FBI(미 연방수사국)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으면서, 로맹 가리와 갈등을 빚는다.

1968년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는 이혼하였다. 로맹 가리는 1970년 인종차별과 이념 대립으로 인한 폭력성을 비판하는 내용의 장편 <흰 개(Chien blanc)>를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임신 중이었던 진 세버그의 아이를 두고 과격파 흑인 민권운동단체인 블랙 팬서(Black Panthers) 지도자의 아이라는 언론의 악의적 루머가 퍼졌고, 충격을 받은 진 세버그의 자살 시도로 딸 니나 하르트 가리가 태어나자마자 2일 만에 사망하기도 했다.

1972년 로맹 가리는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감독한 영화 <킬(Kill)>에서 다시 진 세버그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며 그녀의 재기를 도와주고자 했으나,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로맹 가리는 영화계를 떠나게 되었다.

1979년 9월 8일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실종되었던 진 세버그  파리 근교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약물중독이었으나 로맹 가리는 FBI의 개입을 주장하며 기자회견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 후 마지막 작품으로 <연(Les cerfs-volants)>(1980)이 출간되었지만 문단에서는 로맹 가리의 소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1980년 12월 2일 로맹 가리는 파리의 자택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유서 '결전의 날'을 비롯해 사후 1년 뒤 1981년에 발표된 로맹 가리의 유고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Vie et mort d'Emile Ajar)>을 통해서,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로맹 가리는 편견과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익명성을 선택함으로써 프랑스 문학계를 넘어 전 세계에 큰 파문을 남기고 떠났다.    



결전의 날.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상심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데다 호소하도록 초대받는 법이다. 사람들은 아마 신경쇠약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신경쇠약이라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계속되어왔으며, 내 문학적 작업을 완수하게 해 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인가?

아마도 <밤은 고요하리라>라는 내 자전적 작품의 제목과, '사람들이 달리 더 잘 말할 줄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말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2015년 1월 로맹 가리를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이어 가고 있다. 이런 지속적인 만남이 이어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더 이상 책에서 기대하는 것이 차츰 사라질 때쯤 가리를 만났다. 내가 모르는  작가와 작품이 얼마나 많을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냥 인연이 아니고 내가 모르는 세계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내가 건너가 볼 세계가 아니라는 것만  분명해졌었다.


독서를 지난 10년간 해왔지만 소소한 감동과 재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독서하는 동안 텍스트 안에서 보호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끌어 주는, 빛나는, 무엇이 다소 결여되어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처음 좋아했던 제인 오스틴 와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자매들을 버린다는 것은 아니다. 20대엔 충분히 그녀들에게서 배웠다. 30대가  되고서부터는 또 다른 길이 필요로 했다.


역사소설을 천천히 읽어 나갈 무렵 나는 느린 독서에 의미를 두기도 했었다. 주변을 둘러본다는 생각, 누구나 아는 문학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늦은 만큼 더욱 한 권, 한 권 의미 깊다. 로맹 가리를 만나고 어느 정도 집착과 추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이제는 몇 권의 단편과 장편소설, 진세버그와의 에세이 정도만 남겨져 있다. (참고로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수가 꽤 있다.)


처음 읽은 <자기 앞의 생>은 다시 읽어 볼 작정이다. 본명 카체브 말고도 그는 필명, 가명을 따로 쓰기도 했다. 그가 아자르란 가명으로 <그로칼랭>을 쓰고 다음 <자기 앞의 생>으로 콩쿠르상을 수상하는데 알고 보면 그는 그로칼랭으로 먼저 상을 받을 뻔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가면의 생> <솔로몬 왕의 고뇌> 이 두 작품으로 아자르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고 나의 베스트 작품 안에 들 정도다.


블로그에서 <이것은 별 - 로맹 가리>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포스팅을 했지만 다소 아쉬웠다. 가끔 상상도 했었다. 매거진 같은 것을! 그런데 실제로 브런치에서 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며칠을 홀린 듯이 여기에 옮겨 담고 정리하는데 틈틈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이 시간 로맹 가리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니 나름 감격적인 시간이다.


로맹 가리 하나로 매거진을 이어서 얼마만큼 써나 갈 수 있을지 솔직히 미지수이다. 일순간 재미로 끝날 수도 있다. 열정은 이미 세상에 넘칠 정도로 많다. 설터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열정을 품고 전율한다는 그 말을 믿어 볼까? (매거진은 이제는 브런치북이 되었다)


https://brunch.co.kr/@roh222/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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