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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요리사의 슬픔

별별 사람들 3화

by 매콤한 사탕

날씨가 풀리면서 헬스장 러닝머신 대신 아파트 자투리 공간에 새로 생긴 트랙을 달린다.

50m는 될까? 미니어처 같은 트랙은 한 바퀴를 달려도 1분이 안 걸린다.

직선 코스는 없다고 느낄 만큼 짧다.

커브를 돌고 나면, 곧 커브가 나오고, 그다음 커브를 만나고...

그러다 보니 작은 타원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양새가 된다.

이래서는 속도는 포기해야 한다. 아쉬운 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조그만 트랙을 꽤 좋아한다.

쌀쌀한 기운이 한풀 꺾인 밤공기가 좋고

퐁신퐁신한 트랙의 감촉이 마음을 든다.

무엇보다도 거북이가 되려는 목을 잠시라도 인간답게 들고서

LED 화면을 통하지 않고 생 현실을 볼 수 있는 이 시간이 매우 소중하다.

이 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을 만큼...


그러나 어김없이 전화벨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뿔싸, 나도 모르게 이어폰을 터치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젊은 요리사의 볼맨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핑계는"

"아니, 그럴 리가."

"방해한 거면 끊을까?"


젊은 요리사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젊은 요리사는 연락이 많은 타입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몇 번이고 통화를 재시도한다면

들어줘야 한다.

나는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괜찮아. 얘기해. 무슨 일이야?"

"아니, 다 끝났어."

"뭔데?"

"이직할까 했는데 엄마가 안된대."

"이직?"

"가게에 새 조리장이 왔는데 오래 같이 일하던 아주머니가 못해먹겠다고 나간 거야. 나도 옮기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너무 사람을 못살게 구니까."


젊은 요리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일했다. 그 식당은 깐깐하고 정갈한 음식으로 소문이 자자한 곳으로 모든 지점은 본사 직영이었다.


조리장이 바뀌면 모든 게 바뀐다


젊은 요리사는 조리장은 주방의 대통령 같은 거라고 했다. 일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있고 조리장과 점장만 주기적으로 인사이동을 했다. 이것이 그 식당이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고인물 없이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그들만의 비법. 조리장과 점장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조직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향일 때 둘 모두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구조였다. 낙오자는 탈락했다.


"회사가 좀 악독한 데가 있어. 원래 기업이 다 그렇잖아. 경기가 안 좋으니까 장사는 안되고 그러니까 실적 때문에 점장이랑 조리장이 서로 닦달하고 싸우고 사람들 쪼고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 사람을 줄이려고 그랬던 거 같아. 요즘엔 사람 쉽게 내보낼 수 없으니까 일부러 괴롭게 하는 거야. 나가떨어지라고.


무슨 망치로 부숴대듯이 유리를 깨듯 그냥 다 부숴버리고 사람들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게 옆에서 보이니까 그걸 못 참겠어. 한 사람, 두 사람씩 그만두고 이젠 사람이 없으니까 인건비 좀 남는다고 사람들한테 몇 만 원 더 올려줄게 하면서 더 일 시키고. 무슨 악마의 속삭임 같이."


젊은 요리사의 푸념은 길게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간간히 회사를 두둔했다.


"회사 입장에선 돈 벌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나도 알아. 요즘 다들 힘드니까.


"근데 사람이 뭐랄까? 끝이 없어. 사람마다 다 다르고 그걸 계속 맞춰가야 하고 여기서 10년을 일했어. 좋은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일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한 사람도 있고, 식칼 들고 설치는 정말 무서운 사람도 있고 그랬거든. 근데 이번에 나랑 같이 8년을 일한 아줌마가, 그 이모가 힘들어서 떠난다니까 나는 헛헛하지."


나도 알아,
사람이 힘든 건 어딜 가나 마찬가지지.


"그냥 헛헛해서 전에 있던 점장님한테 전화해 본 거야. 그랬더니 점장님이 여기로 옮길래 돈은 얼마 줄게. 하는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얘기해 봤어. 이직하겠다고. 근데 안된대. 집 대출금 갚아야 하니까. 거긴 큰 식당은 아니니까 경기 안 좋은데 망할 수도 있고. 그래서 그냥 그랬다고. 괜찮아. 다 끝났어. 아무 일 아니야."


젊은 요리사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침묵했다. 하지만 나는 젊은 요리사가 못다 한 말을 삼키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너 말 안 하고 쌓아놓으면 죽어서 사리밖에 안 나온다. 그거 얻다 쓰려고 그냥 말을 해. 말하고 훌훌 털어버려. 얘기를 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 같지만 마음은 편해져.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불안, 불안이 생겼어.


"전에 있던 조리장이 참 맞추기 힘들었어. 자기가 하는 일은 다 해내야 되는 그런 사람 있잖아. 뭔가 완벽하게 해야 하고 강박적으로 좀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성질이 참 더러웠지. 그런데 난 좋았어. 조리장다웠지. 그 사람을 믿고 따라가면 보람 있었어. 일이 재밌고 배우는 것도 많고 잘 해내면 칭찬해 주고 좋은 사람이었지.


세상 참 얄궂지. 꼭 좋은 사람이 떠나


죽었어. 교통사고가 났어. 새벽에 오다가 죽었지. 그런데 그날 난 이 사람이 왜 안 오지? 그날 그렇게 왜 안 올까? 난 속으로 왜 이렇게 사람이 안 오는 거야. 누구보다 완벽한 걸 따지는 사람이 일이 이렇게 많은데 왜 안 오는 거야. 그랬다니까... "


젊은 요리사는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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