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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얼음과 불편한 관계.

별별 사람들 23화

by 매콤한 사탕

얼마 전 집에 놀러 온 T는 냉동고에 있는 얼음메이커를 탐냈다.


"우와~ 이렇게 쉽게 얼음이 빠진다고?"

"편해. 커서 얼음도 한 번에 많이 만들 수 있고"

"이거 나도 사야겠다."


T는 그 자리에서 바로 얼음메이커를 구입했다.


"두 개나 사?"

"사무실에 하나 두려고. 여름엔 아이스커피지."


그랬던 T가 편의점 냉동고에서 큰 얼음컵을 꺼냈다.


"사무실에 얼음메이커 있지 않아?"


대답 대신 T가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사무실로 얼음메이커가 배송 온 날 T는 기분 좋게 얼음을 만들었다.

얼음메이커를 본 동료들은 환호했다.


요즘같이 더운 날 밖에 나가지 않고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먹을 수 있다니 너무 좋다고.

사무실을 같이 쓰는 4명의 동료들은 다 같이 얼음메이커를 관리하기로 했다.

얼음을 떨어지면 채워놓고, 휴일 전날엔 돌아가며 얼음메이커와 얼음스쿱을 세척해 놓기로 했다.


그런데, 얼음메이커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외근을 하고 온 T는 얼음을 만들고 있는 동료를 보았다.

동료는 T를 보자마자 얼음통이 비었는데 얼음을 채우는 사람이 없다며 푸념을 했다.

T는 누가 얼음 채우든 푸념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설마, 지금 나한테 채우라는 건가?'


동료는 T보다 10살 이상 연장자로 나이부심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일의 특성상 사무실 동료들은 모두 대등한 위치였다.


'얼음 만드는 게 뭐 대수라고?'


T는 더는 생각하지 않고 흔쾌히 동료와 함께 얼음을 만들었다.


어느새 T는 얼음 만드는 담당이 되어있었다.

시원한 얼음을 먹을 수 있다면 얼음을 채워놓는 게 딱히 힘들지 않았다.


'이건 얼음이 쉽게 쏙 빠지는 성능 좋은 얼음메이커니까.'


사무실에 같이 쓰는 4명의 동료가 이 여름을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얼음메이커 때문에 문제가 또 생겼다.


그날은 역대급 더위를 갱신 또 갱신한 날이었다.

다행히 외근을 미룬 동료들은 같은 시간 사무실에 있었다. 한 명만 빼고.


외근을 마친 그 동료가 사무실에 들어오는 순간, 한증막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동료는 땀으로 머리를 감은 것처럼 보였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넘기며 축축한 머리카락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 했지만 부질없었다.

이미 젖은 손수건으로 얼굴에 땀을 닦아보았지만 역시 부질없었다.


동료는 냉장고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

얼음통을 꺼내 얼음스쿱을 그대로 냉동고에 던져버리고 땀에 씻지 않은 젖은 손으로 얼음을 꺼내 먹었다.

얼마나 더웠으면 하고 이해해 보려는데 T는 다른 동료들의 경악하는 표정을 보고야 말았다.


알고 보니, 그 동료는 늘 손을 씻지 않고 얼음을 움켜잡았다고 했다.

얼음이 예전만큼 줄지 않는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유리컵에 얼음을 담는 방법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했다.


손을 씻고 얼음스쿱으로 얼음을 담는 사람

손은 씻지만 얼음스쿱을 쓰지 않고 맨손으로 얼음을 담는 사람.

꼭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얼음을 담는 사람

손을 안 씻고 그대로 얼음을 움켜잡는 사람.


어쩌면 편의점 얼음컵이 잘 팔리는 숨은 이유가 이런 것이었을까?


"모두에게 통하는 상식이란 게 있긴 한 거야? 다 허상인가?"



T는 한 명 빼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얼음메이커 관리를 포기했다고 했다.

잘 지내던 동료들의 몰라도 되었을 세계를 알게 만든 얼음메이커는 사무실 창고로 치워버렸다.


"대표한테 말해서 사무실에 얼음정수기 한대 놔 달라고 해야겠네."

"퍽이나!"


T는 편의점 얼음컵을 요란하게 흔들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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