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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16. 2024

사람이란 기대어 서는 존재라서

4. 결핍은 채워 가면 되죠(8)

자신이 이진우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그가 조금 더 진취적으로 스스로의 적성에 맞고, 자질을 더욱 키울 수 있는 그런 미래를 그려볼 수 있도록 도울 어떤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한참 어린 청년의 앞길을 조금이라도 밝혀주는 데 자신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하염없이 이런저런 방법을 고민하던 최현욱이 불현듯 우뚝 멈춰 섰다. 오래전 그가 지금의 이진우 만한 나이였거나, 혹은 그보다 몇 살 더 많았을지도 모를 그때, 아이작 노인이 뭐라고 했었던가. 


- 그렇게 고마워할 것 없다. 그저 내가 조금 더 많이 살아봤기 때문에, 지금 네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 나는 아주 또렷하니 잘 보이거든. 그러니 네가 보기엔 더 평탄해 보이는 길이 얼마 못 가 더 험해질 것도 알고, 이쪽으로 가면 지금 당장은 도무지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아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금세 잘 닦아놓은 길이 쭉 뻗어있는 걸 보게 될 거라는 것도 알지.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거다. 


최현욱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그저 스승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자 시유 작업을 하느라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 있던 그가 허리를 펴며 예의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그런데 그거 아니, 휴이Huey. 너도 지금보다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일 거야. 그걸 너 혼자 알고 감춰두는 건 하지 말아라. 그리고 너는 보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지금의 너 같은 사람이 보이거든 이야기해 주려무나.

- 무엇... 을요?

- 뭐겠니. 지금 내가 너한테 한 것 같은 얘기지.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말이었다. 갸우뚱거리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게 보일 수 있던 반응의 전부였다. 한국이었다면 무슨 선문답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투덜거릴 수도 있었겠지만 유대인 노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어서, 최현욱은 그냥 객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흐른 지금에 와서야 그는 당시 스승이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지금 그의 혈관을 타고 세차게 흐르는 것은, 혈액만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깨달음의 물줄기도 함께임이 분명했다. 온몸이 훈훈하게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 무슨 생각하세요?”


이로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비로소 현실로 되돌아온 최현욱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심상하게 대답했다.


“건설적인 생각이요.”

“선생님도 가끔 진짜 엉뚱한 소리 잘하신다니까요.”

“사람이 어떻게 항상 조리 있는 말만 하고 살겠어요. 그럼 팍팍해서 못 살아요. 엉뚱한 소리도 하고 쓸데없는 짓도 좀 하고 그래야 사는 일이 반들반들하니 윤기가 난다니까요.”

“어,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로미와 최현욱이 얼른 맞장구를 치는 이진우를 놀란 듯이 돌아보았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진우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해하던 처음과 달리 갈수록 말이 늘고 표정도 다채로워졌다.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을 활용하는 데 자유로워진 만큼 이진우는 훨씬 편안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타인과 정서적인 교류를 나누는 일에 자연스러워 보였다. 


자기가 하는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마땅히 인간으로서 갈구하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가 채워지고 있다는 소박한 기쁨. 자신이 이 작은 집단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소속감과 안정감이 빛나는 얼굴을 보고 있던 최현욱이 순간 목이 메었다. 그저 계속되는 권유에 마지못해 열었다고 생각한 수업이, 사실은 단순한 도자기 수업이 아니라 인간적인 교류, 어쩌면 서로에게 그 이상 가는 무엇이 되어주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그에게서 순간 모든 언어를 앗아갔다. 


“선생님? 어, 왜 그러세요?”

“... 아니에요. 갑자기 찬바람이...”

“바람?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내밀던 이로미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이 짓궂게 웃었다.


“우리 식후 커피나 한잔 하러 갈까요? 오늘은 나도 손님으로 우리 사장님한테 커피 좀 주문해 볼까.” 


출근길이 아니어서인지 성큼 앞서 걸어가 문을 당겨 여는 모습이 자못 의기양양했다.  짙은 커피 향이 훅 밀려 나와 바닷바람에 섞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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