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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09. 2024

자기 자신의 장인이 되면 어떨까

4. 결핍은 채워 가면 되죠(6)

갑자기 팍 풀이 꺾인 이로미가 소심하게 항의했다. 


“은지 쌔앰. 저는 아직 어른 아니에요.”

“무슨 소리예요, 로미 씨 정도면 훌륭한 어른이죠.”


젓가락을 살짝 입에 문 채로 입술을 달싹거리던 이로미가 드물게 뭔가를 망설였다.


“어른…이 뭐라고 기준을 정하는지에 따라 다를 것 같긴 하지만요. 저는,”


이로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안을 씻어내는 듯 잠시 차를 머금었다. 


“업으로 삼을 만한 전문성을 갖춘 뒤에 일을 갖고, 내가 무슨 일을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밥 벌어먹을 능력이 되어야 어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보자면 저는 아직 어른이 아닌 거죠. 돈은 벌어도, 여전히 일을 배우는 중이잖아요.”

“저는 조금 생각이 달라요. 일의 숙련도도 중요하긴 한데, 평생의 업이라고 할 만한 일을 일찌감치 찾아서 그렇게 고강도의 스킬을 쌓는다는 건, 좀 중세적이지 않아요? 운도 상당히 따라줘야 하고.” 

“선생님, 지금 저 젊은 꼰대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이로미가 투덜거리자 당황한 최현욱이 서둘러 변명했다.


“아뇨, 로미 씨 사고방식이 고리타분하다고 말하는 건 당연히 아니에요.”

“과연 그럴까…”


이로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평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렇게 마이스터적으로 살고 계신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완전 자기부정처럼 들린다고요.”

“어,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최현욱은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어느새 투덜거리던 낯빛을 지워내고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 빙글거리는 이로미를 보며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 구원은 뜻밖의 사람에게서 왔다. 


“자기 자신의 장인이 되면, 괜찮지 않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들려온 제안에 네 사람이 저마다 깜짝 놀라 주방 아일랜드 카운터 앞에 선 에이미 사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좀처럼 사람들 앞에서 제 의견을 말하는 법이 없는 그녀가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하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도 중요한데…그보다도 각자 자신의 숙련된 장인이 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의 장인…”

“생전 처음 듣는데 뭔지 완전 알겠어요.” 

“음, 좀 그렇죠?”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로미를 보며 에이미 사장이 천천히 설명했다. 


“자투리 시간엔 뭘 한다든가, 기분이 가라앉을 때는 확실하게 기분전환이 되는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 둔다든가…하는 식으로 자신을 잘 다룰 수 있게 하는 거죠.” 

“그거 진짜 좋네요. 근데 그런 방법을 알아내는 것도 쉽진 않을 것 같아요. 자기를 상대로 실험 여러 번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야, 그렇죠.” 


조금 허탈해진 표정으로 김은지가 불평처럼 들리는 말을 중얼거렸다.


“결국 뭐든 시간과 공을 들여야만 알 수 있는 걸까요.”

“그렇긴 한데, 저는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자기 파악이 되지 않나 싶어요.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고 잘 굴러가게끔 물 주고, 밥 주고, 기름치고 하는 거죠.” 

“다 필요 없고 그냥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고루 듬뿍 먹으면 되는데…”


이로미의 말에 웃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자기 이해지능 같은 거네요.” 


김은지가 조그맣게 말했다.


“와, 어려운 말이다.”

“학교에서 아이가 연 단위로 그런 검사받아 오거든요. 거기에 있던 말이 생각나서요.”


특별히 대단한 칭찬도 아니었건만 김은지의 얼굴은 순식간에 발그레해졌다. 


“맞아요. 자기 자신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을수록 남들에 대한 이해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해요.” 


사장이 에이미 사장의 말을 곱씹듯, 네 사람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생경한 이야기였으나 듣고 보면 지극히 당연해서 딱히 뭐라고 대꾸할 말이 찾아지지 않는, 그런 류의 이야기였다. 


“오- 난 그럼 잘하고 있는 거구나.” 


이로미가 환호 대신 젓가락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통통 두드렸다. 


“저는 뒤통수 제대로 세게 맞은 기분이에요.”     

“너무 당연한 얘기긴 한데,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죠. 자기계발서를 읽는 취미가 있으면 또 몰라도.”  “그러니까… 뭐 엄청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못해도 나는 그냥 나의 달인이 되면 되는 거군요.” 

“맞아요.”


에이미 사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진지하게 부연했다.      


“중요한 건, 구체적이어야 하는 거예요. 추상적으로 나는 여행이 좋아, 하는 게 아니라 나는 바닷가에 가서 노을을 보면서 막 떠낸 회 한 접시를 먹는 게 너무 좋아. 이렇게.” 


평소 말이 없는 편인 에이미 사장이 그 말을 하며 따뜻하게 웃었다.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거.”


김은지가 마치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모처럼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내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 하회탈처럼 우습게 보일지는 몰라도 나를 활짝 웃게 하는 말. 너무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다시 볼 수 있는 영화. 슬플 때 몇 번이고 다시 들으면 위로가 되는 노래. 또 뭐가 있을까요?”


다들 말이 없어지고 조용한 침묵이 작은 식당 안에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가끔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못 안으로 잠겨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지금 히요코 식당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시간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런 거 너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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