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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02. 2024

내가 본 것을 여러분도 보게 되기를

4. 결핍은 채워 가면 되죠(4)

“저는 그냥 봐서 적당히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주문이었지만 이로미는 최현욱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늘 그랬다. 자신의 취향을 내세우기보다는 일하는 사람을 배려해서 최대한 주방 편의를 높일 수 있는 메뉴를 선택하곤 했다. 가끔씩은 선생님도 조금 이기적으로 행동하셔도 될 텐데, 생각했으나 이로미는 제 의견을 덧붙이지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다들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 다음엔 저도 꼭 낄게요.” 


윤소은이 인사를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이로미가 약간 수선을 떨면서 이진우와 김은지를 이끌고 떠나고 남은 공방에 기다렸다는 듯이 적막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휴…”


제일 가까이 있던 의자를 당겨 털썩 주저앉은 최현욱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들어찼다. 원체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던 내성적인 성향이었다. 사람들이 바짝 붙어 앉아 연신 그에게 뭔가를 물어보며 정신을 부산스럽게 하는 것이 그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어도 제법 피곤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익숙한 적 없던 그 시끌시끌한 어수선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생각 외로 썩 괜찮기까지 했다. 어째서일까. 딱히 편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말로 자신이 뭔가 대단한 것을 전수하는 스승이라도 된 것 같은 우월감에 젖은 것은 더더욱 아닌데. 뭔지 모를 미묘한 감정의 결을 더듬어가던 최현욱이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을 했다.


동료.

그저 자신은 조금 그들보다 먼저 본 것을, 그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의 풍경에 가 닿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셰르파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어쩌면 자신이 평생을 그 안에 몸을 묻고 살아도 괜찮겠다고 느꼈던 그 따뜻한 정경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가슴속 어딘가가 일렁이며 간지러워진 찰나, 최현욱은 소지품을 챙겨 얼른 작업실을 나섰다. 그들과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스스로를 조금쯤은 자랑스러워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 누구에게도 빚진 것 없이 벅차오르는 그런 기분.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      


“야, 진짜 좋다. 동해바다 얼마 만이냐.”


윤소은은 헤벌쭉 웃으며 양손을 허리에 짚고 바다를 바라보고 선 백지아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몇 해 만에 느닷없이 날아든 문자메시지도 당혹스러웠지만 지금 이 도시에 와 있다는 말에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무례에 가까운 방문이 아닌가. 


수업 중이라는 말끝에 그럼 어디 어디 바닷가에서 기다릴 테니까, 거기로 와, 하는 말만 달랑 남기고 전화는 끊겼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찾아온 친구였다. 그건 그거고, 바다는 바다고. 범죄자 신문할 것도 아니고 어렵게 시간 쪼개준 취재원을 만난 것도 아닌데, 느긋하면 뭐 어때, 생각하며 윤소은도 백지아처럼 수평선을 보며 이마 위로 손차양을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윤소은의 질문에 기지개를 쭉 켜던 백지아의 동작이 그대로 멎었다. 윤소은이 의아하게 그대로 멈춰버린 백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얘, 지아야, 하고 부르니 그제야 백지아는 팔을 아래로 툭 떨어뜨리며 슬그머니 윤소은을 곁눈질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아니. 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 일은 네가 있었지.” 


윤소은의 표정마저 얼어붙었다. 암 투병에 심신이 말라붙어가던 몇 년간, 많지도 않던 인연들이 절로 떨어져 나갔다. 일부는 자의였고, 일부는 마치 가을에 낙엽이 지듯 자연스럽게 떨구어졌다. 그런 줄 알았다. 몇 분간 그들 사이에 침묵이 계절감을 잃은 바람과 함께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갑자기…?”

“미안. 너한테는 다시 들추고 싶지 않은 얘기일 건데, 사실 내 마음 편하자고 굳이 내 변명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시선을 회피하는 걸까. 백지아의 눈은 바다 위에서 자잘하게 구르는 윤슬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윤소은은 모든 감각기를 닫은 채로 귀만을 열어둔 채 침묵을 지켰다. 


“동문들 모였을 때 소식은 들었거든... 너하고 아주 친했던 것도 아닌 내가 어쭙잖게 어디서 주워들은 소식으로 너 그렇다며, 어떡하니. 그래도 힘내야지, 이런 말 하는 것도 너무 스스로가 가증스러운 거야.” 

“…”

“그러다가 겨우겨우 붙잡은 용기로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는 안 되고.”

“… 미안. 아마 그때 항암하느라 정신도 없고 걸려온 전화 확인하고 그럴 짬이 안 났던 때였나 보다.”


백지아가 끄덕이며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변명이지만 나도 그 뒤로는 자리 잡고 이리저리 구르느라 다시 연락할 엄두도 못 냈지.” 

“그랬구나.”

“그렇다고 그냥 나는 아무것도 모르네 하며 나 사는 거나 열심히 살자며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훅훅 흘러서, 문득 소은이는 괜찮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궁금한데, 차마 전화를 걸어볼 용기는 안 나고.” 


백지아의 말을 들으며 윤소은은 가만히 과거를 함께 걸었다. 어둠 속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순간 어디가 자신을 집어삼킬 늪인지 알 수 없어 떨고 두려워했던 찰나들이 순식간에 현재로 되살아났다. 제 감정을 무덤덤함 안에 가린 백지아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속절없이 살다 보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더라고. 너 잘 지내는지 보고 싶었어. 그러면 왠지 나도 용서받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근데 또 약속 잡자고 연락을 못하겠는 거야.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일단 내려와 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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