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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ul 05. 2024

늦었기에 더 잘 들리는 말

4. 결핍은 채워 가면 되죠(5)

스스로도 무슨 만용으로 저지른 짓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살래살래 내젓는 백지아의 후회 가득한 모습에 윤소은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보면 좋지만 못 봐도 할 수 없고 하는 식으로 문자 보내놓고 기다린 거야?”

“사실 엄청 긴장하고 보냈어, 그거. 답장 안 와도 할 수 없다 생각했고.”

“… 애초에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고루 살뜰하게 관심을 주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그거야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항상 그러고 살아. 그치만,”


내내 시선을 피하던 백지아가 윤소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항상 뭐든 열심히 성실하게 하는 애들 있잖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 생각하게 하는 사람. 나한테는 네가 그랬어, 소은아. 너는 투병도 열심히 할 것 같았어. 끝까지 지지 않고 정말로 잘 해낼 것 같았어. 너한테, 그 말이 필요했을 때 못 해준 게 뒤늦게 아쉽고 미안하더라. 지금이라도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기도 했고.”

“...”

“뭐, 그 김에 오랜만에 바다도 보면 좋은 거고.”


머쓱하게 입을 다문 백지아가 다시 바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윤소은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온 것은 일 분 남짓이 흐른 뒤였다. 


“고마워, 지아야.”


바다 너머 무언가를 보고 싶은 것처럼 하염없이,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와 시선을 평행하게 두고 있던 윤소은이 마침내 응어리진 무엇인가를 뱉어내는 것처럼 힘겹게 말했다. 지난 시절을 돌이키는 말은 한 번 나오자 다른 이야기들을 이내 끌고 나왔다.


“지금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땐 너무 힘들었어서, 아마 고마운 이야기를 들어도 고맙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아. 알잖아, 어떤 때는 아무리 좋은 말도 듣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 거.” 

“응... 알지.”

“난 항상 그랬거든, 말도 시기와 때가 있다고. 그 순간을 놓치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빛을 잃고 의미가 퇴색된다고. 근데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네.”


윤소은이 천천히 웃었다. 뒤이어 곱씹고 있던 말이 흘러나왔다.


“조금 빛바래면 뭐 어때. 결국 전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고마워. 늦게 도착해서 오히려 반가운 말도 있다는 걸 덕분에 알았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를 보며 제각각 다른 웃음을 웃었다. 한참 늦어버린 말이나마 제대로 전했기에 만족스러워서, 늦었기 때문에 외려 누군가의 진심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가끔은 늦된 것도 나쁘지 않구나. 윤소은이 혼자 속삭였다.      


***      


테이블 위에 차례차례 놓이는 쟁반을 보며 김은지가 탄성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렇게 예쁘게 플레이팅 하는 게 가능한 거예요?”

“그렇게 봐주니 고맙네요.”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 여성이 수줍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반질반질한 동그란 원목 쟁반에 꽃처럼 여기저기 핀 자기 그릇에 놓인 색색가지의 찬들은 입에 넣기에 황송할 정도로 고왔다. 젓가락을 들고 우물쭈물하는 일행들을 휘둘러 보던 이로미가 의기양양하게 반찬그릇에 젓가락을 올리며 일장훈시를 했다. 


“아, 정말. 왜들 그러세요,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인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제야 젓가락질에 동참한 일행들의 눈이 하나 둘 크게 뜨였다. 


“와, 맛있어요. 예뻐서 먹기 미안할 정도였는데.”


김은지가 눈이 동그래진 채로 우물거렸다. 마주 앉은 이로미가 흐뭇하게 그죠, 하고 맞장구를 치며 차를 따랐다.


“저도 뭐, 음식이 맛만 있음 됐지 예뻐서 뭐 하나주의였는데 에이미 사장님이 해주시는 거 맛보고 완전 생각이 바뀌었다니까요.”


재잘거리는 이로미의 말을 듣고 있던 식당 사장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근데 가게 이름도 사장님 성함도…”


김은지가 궁금한 듯이 말을 꺼냈다가 괜한 소리를 했나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음, 맞아요. 일본식 이름이죠. 일본에서 유학할 때 지었던 이름인데 부르기 편하고 쉬워서 계속 쓰게 됐네요.”

“그러시구나…대단하세요.” 


김은지가 감탄을 아끼지 않고 있는 동안 이진우는 민망한 듯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접시를 들여다보았다.


“근데, 왜 제 것만 이렇게 많…”

“잘 먹어야죠, 학생.”


평소 목소리가 크지 않은 에이미 사장이 웬일로 목에 힘을 주어 지긋이 타일렀다. 큭큭거리던 이로미가 짐짓 엄격하게 가세했다.


“어허, 어른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지.”

“잘 먹어야 한다잖아요, 이진우 씨. 얼른 먹어요.”

“그래도 이건 좀 너무 많은…네…”


주변에서 한 마디씩 거드는 통에 반박 한 번을 못하고 붉어진 얼굴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진우를 빤히 보던 김은지가 중얼거렸다. 


“진짜 착하네…”

“네?”

“누가 착한데요?”


빨리 쫓아오느라 걸음을 서두른 탓인지 조금 숨을 몰아쉬며 비워놓은 테이블 끝 의자를 빼어 앉은 최현욱이 끼어들었다. 


“어, 쌤! 금방 오셨네요?”

“네, 

“진우 씨 정말 착하다고요. 어른들 얘기도 잘 들어주고.”


아마도 김은지가 말하는 어른이 그녀 자신이나 에이미 사장이리라 짐작한 최현욱이 눈길을 그리로 돌리자 김은지가 얼른 덧붙였다.


“로미 씨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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