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생각하고 혹은 짐작하고
“아니 호경쌤, 왜 그리 한숨을 빡빡 쉰대?”
“민주쌔앰...”
아침부터 맥이 죽 빠진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교무실에 들어온 최호경은 자신의 고민거리를 털어놓을지 말지를 잠깐 고민했다. 영어 교사인 장민주가 국어 선생이라는 최호경의 정체성이 잔뜩 묻은 걱정을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 줄 수 있을까?
“뭔데, 얘기해 봐. 혹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아, 그게요. 아침 출근 시간에 우연히 애들이 대화하는 걸 들었는데...”
호경의 고민은 이러했다. 1-2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둘이 등굣길에 마주쳐 인사를 주고받더니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본의 아니게 아이들의 뒤를 따라 출근하던 호경은 점점 벌어지는 입을 다물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고 호소했다.
말인즉슨, 그 둘의 대화에 등장한 단어 중에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2번, 동사가 3번 나온 것을 제외하고 모조리 두 개의 어휘로 모든 의미가 수렴됨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이 성립하더라는 것이었다.
그토록 품이 넓고 무한대로 의미 확장이 가능한 기적의 낱말은 바로 2×9, *라였다고. 제2의 노스트라다무스적 종말 예언을 듣고 온 듯한 얼굴로 호경이 중얼거렸다.
“쌤, 이건 재앙이에요. 한국어는 멸종위기종이 됐다고요. 다음 세대에선 분명 9 품사가 먼저 종말을 맞을 거예요.”
“그럼 호경쌤이 애들한테 그래봐. 선생님이 오늘 아침 출근길에 이러저러해서 몹시 충격이 크다고. 너희가 지금 훈민정음을 사장하고 영어를 대한민국의 공식 언어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말야. 정말 그게 원하는 바가 맞냐고. 그럼 좀 깨닫는 바가 있으려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던진 민주가 까르륵 웃었다. 호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장민주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하려는 찰나 민주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있지, 언어라는 게 그렇게 생명력이 약하지 않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데, 말이야 말해 뭐 해. 정말로 위험한 건 사용자 수가 절대적으로 줄어드는 민족의 언어지, 우리말은 아직 아닌 것 같아.”
“쌤... 온갖 난치병을 다 달고 비실비실 오래 사는 게 무슨 의미예요, 건강해야 장수하는 게 의미가 있지...”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러네.”
민주가 책상을 두드리며 과격할 정도로 폭소하더니, 짐짓 진지하게 호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거국적으로 고민하지 마. 호경쌤이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말이라는 건 제법 자정능력이 좋아.”
최호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랫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자긴 국어 선생 아니라 이건가.’
물론 민주가 들으면 심히 억울할 말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아직 30대로 젊은 데다 나라말 사랑이 지극한 호경의 마음은 나라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기에 이르렀는데, 태평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타과목 담당 선생의 말은 자신의 걱정거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성실한 태도로 보일밖에.
수업이 없는 시간 내내 호경은 계속 어떻게,라는 질문에 매달렸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해야 사라진 말들을 삶에 도로 불러들일 수 있을지. 일개 교사가 붙들고 있기엔 너무나 거대한 이슈였으나 또 어떤 면에선 그렇게 작은 개개인이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호경은 생각했다.
중간지대, 혹은 완충지대적 낱말들의 사멸extinction of middle earthian words.
생각나는 대로 입속에서 중얼거려 본 말인데 호경은 자못 비감한 뉘앙스까지 휘감은, 책 혹은 연구논문의 부제 같은 그 말을 마침 눈에 띈 빈 종이 위에 옮겨 적어보았다. 뭐가 될지는 몰라도 제목부터 붙여 놓았는데, 이제 이걸 갖고 뭘 한담?
“저, 국어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호경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깊은 잠에서 깬 듯 늘어져 있던 상반신을 후다닥 일으켰다. 초롱한 눈으로 항상 열심히 수업을 듣던 학생이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 그래- 윤수. 무슨 일인데?”
“저 이거, 잘 모르겠어서 좀 여쭤보려고요. 여기 이거... 정서를 표현하는 글쓰기에 나온 이 예시문 있잖아요. 이게 어떻게 진솔한 게 돼요? 진솔하다는 설명하고 완전히 반대되는 예시 아니에요? 사실은 제대로 안부 인사를 전한 게 아닌데 받는 사람이 오독한 거잖아요.”
호경이 고개를 끄덕이고, 판에 박힌 설명을 해주었다. 다시 말해 점수를 보태기 위해 필요한 팁. 질문하러 온 아이, 신윤수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럭저럭 수긍한 듯했다. 학생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경이 속으로만 말했다.
사실,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야. 나도 납득하지 못한 걸 너한테 이해하게 하려니까 정말 힘들고 이게 무엇하는 일인지 모르겠고 그래. 그런데 우리는 다들 어쩌면 스스로 납득하기 힘든 일 한두 개쯤은 모르는 척 지속하면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책을 챙겨 나가려던 윤수가 우뚝 멈추어 섰다. 고장 난 로봇이 끼기긱, 움직이는 것처럼 고개가 돌아가더니 호경의 책상을 슬그머니 곁눈질했다.
“왜? 아직 물어볼 거 남았어?”
“쌤, 저거 어디에 나오는 말이에요?”
“어어?”
당황한 호경이 윤수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무안하게 웃어버렸다.
“그거, 선생님이 아까 뭘 좀 생각하다가 그냥 끼적인 건데.”
“완전 멋있어요! 무슨 아포칼립스 소설 제목 같아요.”
“그... 래? 그런가?”
“네. 좀 비장한 것도 같고. 이렇게이렇게 타이틀 올라가면 웅장한 테마음악이 깔릴 것도 같고 막...”
“그거 좀 스타워즈적인데.”
“아뇨! 완전 호경쌤적인데요?”
“그게 뭐야.”
호경이 풋 웃어버렸는데 윤수는 진지했다.
“진짜요, 쌤이 맨날 하시는 말을 멋있게 풀어쓴 거 같은데. 쌤 맨날 그러시잖아요. 얘들아 세상엔 극호와 극혐만 있는 게 아니야... 까먹지 마, 응? 맨날 그러시면서.”
“내가 그랬나.”
“네네. 완전. 멋있어요. 쌤이 게임 캐릭터라면 그 밑에 이런 수식어 붙을 거 같아요. 멋있다.”
윤수가 종알종알 떠들다 종 치겠다고 후다닥 가버린 뒤 호경이 가만히 자신의 글씨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기나긴 인생 중 무엇엔가 매진했던 시기를 가리키는 타이틀이라. 그것도 썩 괜찮을 것 같았다. 호경이 가만히 그 글자를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표제어_헤아리다/모티브_김성우+엄기호「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사진: Unsplash의Glen Carr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