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풀이엽편 | 체득하다

말로 들어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어떤 것들을 몸으로 깨닫는 순간

by 담화

『거기 둘, 이리 와. 빅 짐이 뵙고 싶어 하신다.』


“이게 뭐야, 윤준아?”


도시락을 싸 왔으니 오늘은 혼자 먹겠다고 남아 있었는데, 언제 돌아온 것인지 어깨 위로 색 없는 그림자가 유령처럼 툭 떨어졌다. 기겁한 윤준이 푸닥거리며 들여다보고 있던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을 후다닥 밀어 올려 치웠으나 하진의 예리한 눈은 이미 화면에 떠 있던 문장을 날름 훑은 뒤였다.


“뭔데, 뭔데. 비밀이구나? 무슨 대사 같던데, 소설 쓰니?”

“넥? 아니에요, 제가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뭐길래 그렇게 놀래서 감춰? 비밀일기야?”
“에이, 정말...”


윤준이 뒷덜미를 벅벅 긁다가, 이내 ‘꺼리’를 찾은 하진에게서 도망갈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이실직고했다.

“취미예요.”

“대사 쓰는 게?”

“아니요! 제가 쓰는 게 아니고요. 모으는 거예요.”

“대사를?”

“설마요. 그런 게 아니고... 음... 저한테 의미가 있는 특정한 페이지의 어떤 문장들을 모아요. 그냥 소일거리 삼아.”

“우와, 정말? 그거 어딘가 좀 컨셉추얼 아트 같다.”

“그게 뭐예요?”


잠시 꽃가루와 함께 허공에 부유하는 먼지를 노려보던 하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간결하게 답했다.


“그냥 있어 보인다고.”


그 말에 윤준이 순식간에 납득했다.


“아-”

“그래서 그 아티스틱한 취미의 컨셉은 뭔데? 궁금하다야.”


윤준이 꾸무럭거리며 죄 없는 스마트폰 화면을 닳도록 문질렀다. 하진이 인내심 있게 얼마를 기다렸을 무렵 마침내 윤준이 자신 없는 소리로 말했다.


“비웃지 마세요, 네?”

“내가 왜 남의 신성한 취미 생활을 비웃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게요, 제 이름을 획수를 세어보면 똑같이 다섯 획씩이거든요.”


윤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진이 테이블에 대고 손으로 낱자를 쓰며 입으로 획을 헤아렸다. 이내 하진이 납득한 듯 끄덕거렸다.


“진짜 다섯씩 5, 5네.”

“그죠, 그죠. 그래서 제가 재밌게 읽었던 책들의 55페이지의 다섯 번째 문장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오, 컨셉이 재미있네.”


하진의 칭찬을 들은 윤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 솔직한 반응에 하진이 웃음을 꼭꼭 깨물어 넘기며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얼마나 모았어?”

“그렇게 많이는 아니에요. 근데, 이걸 모으다 보니까... 사실 제가 진짜 까막눈이거든요?”

“... 너 까막눈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쓰는 말이야?”

“... 무식한 사람 아니에요?”


하진이 잔뜩 힘주어 눈코입을 얼굴 중앙으로 모았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를 까막눈이라고 했어, 옛날에. 아무튼, 활자에 큰 관심이 없었단 뜻이지?”

“네, 그거요. 사실 저 책도 안 좋아해요. 근데 되게 재밌게 읽은 게 있었어요. 수하 형이 추천해 줘서.”

“한수하가 책도 추천해 줘? 별일이네.”

“네. 저도 영화로 본 적 있는데 그 영화 얘기를 하다가 형이 알려줬어요. 원작이 있는데 영화하곤 좀 다르지만 원작 소설도 엄청 재미있으니까 쉬엄쉬엄 한 번 읽어보라고요. 그런데 진짜 재미있었어요. 책은 다 지루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거든요.”

“뭐길래?”

“그건 비밀.”


윤준이 히죽 웃었다. 하기야 책 제목이 무슨 상관이랴, 지금 윤준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었는데. 하진이 바짝 귀를 기울이며 채근했다.


“그래서? 계속 얘기해 줘.”

“그 책이 너무 재미있었어서 어떻게든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는 거예요. 남들처럼 무슨 글재주가 있어서 리뷰 같은 걸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날짜 적고 책 제목 적고 다 읽었음, 이렇게 쓰기엔 또 좀 시시하고.”

“그래서?”


윤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한테 물어보니까 마음에 들었던 문장 같은 걸 옮겨적고 기록으로 남겨도 괜찮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그것도 좀 별로라서.”

“그래서 그 있어 보이는 컨셉을 힘들게 개발했구나?”

“넵.”


윤준의 해맑은 대답에 하진은 잠시 고민했다. 자음과 모음이 모여 한 음절을 구성하는 한글의 글자 중 5획으로 이루어지는 이름 낱자가 얼마나 많은지를 말해줄지 말지 몹시 고민스러웠으나 하진은 갓 스물이 넘은 어린 성인의 자부심을 지켜주기로 결심했다.


“잘했네, 나름 의미도 있고.”

“네. 그래서 많이는 못 읽어도 쭉 읽은 책들은 그렇게 55페이지 다섯 번째 문장들만 모아서 올리다 보니까, 그런 거 뭐라고 하죠? 문체? 스타일?”

“응응, 맞아.”

“그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그렇게 얘기해 주셔도 뭔 소린가 했는데 직접 내가 옮겨서 올리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따라 읽게 되는데, 진짜 신기한 게요, 소리 내서 읽다 보니까 건조체가 뭔지, 뭐였지? 우유체? 암튼 이해가 안 갔던 그게 뭔지 딱... 알겠는데, 우와. 그거 좀... 약간... 아 씨, 표현을 못하겠네.”


윤준이 다시 뒷덜미를 벅벅 긁었다. 그러나 하진은 윤준이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몸으로 느낀 거네, 옮겨 적으면서.”

“어, 맞아요!”


윤준이 반색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적절한 표현법을 찾아내서 몹시도 기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 개운하다는 표정도 잠시, 윤준은 금세 심각하게 얼굴을 구긴 채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그건가? 나이 먹으면 저절로 깨치게 되는 그거?”


결국 하진은 푸웃, 하는 소리를 내며 내내 내리누르던 웃음을 폭발적으로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이 마흔을 향해 가는 나이라고 해도 그렇지, 스물몇밖에 안 된 덩치는 산만한 알바생이 한 말이 이렇게까지 귀여울 일인가, 하는 자괴감을 동시에 느끼며 그녀가 마침내 테이블을 내리치며 깔깔 웃었다.


“야, 그거 아니야! 저절로 깨치기는 뭘...”

“그렇다고 왜 또 그렇게 비웃으세요.”

“비웃는 거 아니야... 하...”

“그럼 뭔데요.”


한참을 끅끅거리고 웃던 하진이 간신히 발작적인 폭소를 진정하며 훈계하듯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학교에서 개념적으로 배운 것들 있잖아, 네가 지금 말한 것처럼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에 아, 이거 뭔지 알겠는데? 싶은 것들. 그런 게 사실은 몸의 감각으로 체득되는 지식들이 꽤 있어.”


하진의 말이 영 생소했는지 윤준이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하진이 가만히 제 생각을 다듬으며 오래전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표제어_체득하다/모티브_로버트 F.영「민들레 소녀」]

사진: UnsplashBeth Jn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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