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풀이엽편 | 생소하다

서먹하고 낯설게, 익숙함을 잊기 위하여

by 담화

출고 내역을 정리하던 하진이 생각난 듯 벽시계를 흘긋 바라보았다. 오후 다섯 시. 평소라면 이미 어린이집에서 서라를 데리고 나왔을 시간이었지만, 최근 어렵게 수입한 희귀 모종이 주문이 몰리면서 작업량이 폭주한 탓에 하진은 여전히 화원에 발이 묶여 있었다.


-정말 미안해, 유진아. 이번 주만 좀 부탁할게.

-뭘 그렇게 미안해해. 정 미안하면 퇴근할 때 캔맥이나 좀 사 오든가. 치킨은 기본, 알지?


두 살 터울인 동생 유진은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여서 그나마 시간 운용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물론 마감을 코앞에 둔 의뢰가 있을 때는 예외였지만. 유진은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서라도 유진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유진에게는 무엇이든 말만 하면 뚝딱 종이 위에 나타나곤 했으니, 아이에게는 제 이모가 마법사만큼이나 대단한 사람이었다.

“누나,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서라는 어쩌고.”


함께 밀린 일처리를 하느라고 저녁도 거르고 있으면서 수하가 서라를 걱정했다. 하진이 느슨해진 머리를 다시 묶느라고 입술에 머리끈을 문 그대로 어눌한 발음으로 대거리를 했다.


“블극증을드흐...”

“당연히 걱정하죠, 서라는 아직 어린데. 윤준이하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누난 들어가요, 먼저.”


고무줄을 머리 뒤통수에서 힘주어 돌리던 하진이 슬쩍 곁눈질을 하자 사색이 된 윤준이 보였다. 순간 푸핫, 하고 격하게 웃음을 터뜨린 하진이 결국 소리 내어 깔깔 웃고 말았다.


“야,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윤준이 울겠다.”

“아니, 그래도.”

“스읍. 얼른 일이나 하자. 조금만 손 빠르게 움직이면 여덟 시면 끝낼 수 있을 거야. 자, 빨리빨리!”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어도 고된 육체노동이 수반되면 지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시침이 느릿느릿 기어가는 동안 산더미처럼 박스가 쌓여갔고 세 사람은 점점 말을 잃고 기계적으로만 움직였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예약물량을 체크하던 수하가 콧방울을 잡고 꾹꾹 누르며 마침내 한숨을 뱉었다.

“드디어 끝.”


테이프 커터에 걸린 박스테이프가 주욱 뜯기는 소리가 흡사 퇴근을 외치는 것처럼 유난히 컸다.


“우어어, 끝, 끝!”


윤준이 탄성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뱉으며 널브러지자 낯익은 택배기사가 박스를 나르다 말고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항상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택배로 보내도 꽃이 멀쩡해요?”

“멀쩡하도록 무지하게 신경 쓰죠... 그렇다고 또 과도하게 포장하면 환경 쓰레기를 양산하는 꼴이 되니까 포장재도 우리 편하자고 아무거나 못 써요. 이게 그래서 힘들어요.”

“저는 꽃을 사는 사람이 세상에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거든요. 근데 여기서 나가는 물량이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그쵸, 장난이 아니죠. 저희도 맨날 죽겠어요, 진짜. 알바 하나 더 들여야 하나 싶기도 한데 또 그러기엔 좀 힘들고.”


사담은 거기서 끝이었다. 택배기사는 다시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완전히 나가떨어지기 일보직전이 된 화원의 식구들은 제각각 자신이 편한 자세로 늘어져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나, 얼른 가보라니까.”

“아우, 됐다니까? 지 좋아죽는 이모하고 같이 오랜만에 죽이 맞아 놀고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애 엄마도 걱정 안 하는데 왜 네가 난리냐?”

“아, 유진이가 갔어요?”

“도대체 네 머릿속의 나는 뭐 하는 인간으로 인식이 돼 있길래 그런 말이 나오는 건지 좀 궁금하다. 아니다, 안 궁금해. 하- 나- 도 안 궁금해.”


투닥거리는 하진과 수하를 재미나게 구경하던 윤준이 갑자기 툭 끼어들었다.


“그런데 사장님하고 형은 어쩌다 식물 일을 하게 됐어요?”


지나치게 해맑은 윤준을 째려보던 하진이 손을 휘적휘적 내저으며 불평했다.


“최윤준, 한수하랑 나 동업자거든. 근데 왜 나는 사장님이고 쟤는 형이냐?”

“사장님은 중년의 사장님 포쓰가 있으니까요...”

“한수가 나보다 더 속 늙었어... 그리고 나 아직 마흔 안 됐거든?”

“재밌는 표현이네, 식물 일.”


하진과 윤진의 투닥거림을 싹둑 자르며 수하가 끼어들었다. 윤준이 반색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죠? 저도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린 건데 좀 재밌는 듯.”

“응. 그러게. 근데 이게 진짜 무슨 대단한 사업 계획이 있어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


대답하던 수하가 조심스레 하진의 눈치를 살폈으나 하진은 모른 척 딴전을 부렸다. 수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하가 하진과 통신 판매업, 그중에서도 식물 판매를 시작한 건 순전히 ‘삶에 낯설어지기 위해서’였다. 인생의 모든 것에 진저리가 난다며 몸서리를 치는 하진에게 마음의 빚을 잔뜩 지고 있던 수하는 대뜸 제안했다.


-선배, 나 준비하는 일이 있는데 합류할래요?


도대체 얼마나 그 시기의 ‘사는 일’에 학을 떼고 있었던지 하진은 일고의 여지도 없이 그러겠노라 했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시작한 일이 자리 잡기까지 매일이 어찌나 전투 같았는지, 하진은 인생은 지긋지긋한 거라고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을 싹 잊었다.

온라인 쇼핑몰이야 이미 깔릴 대로 깔렸지만, 식물 판매업은 이제 막 고개를 들어 올리는 떡잎처럼 누군가가 쳐다봐 주어야만 하는 시기였다. 사람들은 화초를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구입한다는 사실을 낯설게 여겼다. 그 낯선 불편함을 파고들어야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마케팅을 전공한 수하의 지론이었다. 그 서먹한 기간을 악착같이 버텨 지금의 이름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수하의 자부심이었다.


인생의 괴로운 시기를 무탈히 넘기기 위해서는 때로는 새롭고 낯선 것이 주는 불편함에 정신이 팔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수하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윤준의 초롱한 눈빛을 슬쩍 외면하며 생각했다.




[표제어_생소하다/모티브_사라 스튜어트&데이비드 스몰 「리디아의 정원」]

사진: UnsplashMarkus Spi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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