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갑자기
‘아, 어떡하지. 하필이면.’
하진이 인상을 쓰며 작은 원피스를 들어 올렸다. 지금은 같이 살지 않지만, 한 달에 한 번 아이를 만나는 전남편이 실용적인 옷만 입히는 하진이 못마땅했던지 보란 듯이 백화점에 데리고 가 사 입혀 보낸 사치스러운 디자인의 원피스였다.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서라도 책 속 소공녀나 입을 법한 그 원피스를 너무나 사랑했다. 워낙 바깥놀이를 많이 하는 어린이집이라 유일하게 체육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금요일이 서라가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옷장에서 꺼낸 원피스 앞자락에 달린 장식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게 아닌가.
그냥 보통 단추였다면 급한 대로 옷핀 하나 찔러서 고정시켜 입히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여밈이라는 본래의 역할을 맡고 있는 단추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직경 3센티미터는 될 법한, 조악한 까메오 장식이 들어간 단추였다는 게 지금 하진을 괴롭히는 급성 두통의 근원이었다. 하진의 눈에나 읽히는 조악함이었지, 서라의 눈에는 자신이 어쩌면 대단하고 근사한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가 닿게 해 주는 중요한 매개물이었다. 어젯밤에 미리 꺼내서 확인해 둘걸, 하는 뒤늦은 후회는 하진의 속만 긁었다. 이제 5분 뒷면 서라를 깨워서 아침을 먹여야만 했다. 하진의 이마에 깊이 주름이 파였다.
잠시 고민하던 하진이 돌연히 고개를 쳐들었다. 느닷없이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른 탓이었다.
하진은 수납장을 뒤져 언젠가 서라의 생일날 누군가 사 보냈던 케이크 상자에 둘러져 있던 고급스러운 리본을 꺼냈다. 웬만한 케이크 하나 값이 일반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 케이크 세 상자를 살 값이어서 늘 구경만 하며 지나다녔던 유명 파티시에가 운영하는 가게의 것이었다. 브랜드 로고가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깔린 우아한 골든 베이지 컬러의 공단 리본이 예쁘기도 예뻐서 기념 삼아 보관해 두었는데, 이리도 요긴하게 써먹을 일이 생길 줄이야.
화원 일을 하느라 이런 수작업에는 능숙한 하진이 재빠르게 봉긋한 리본 하나를 만들어 단추가 떨어진 자리에 꿰매어 붙였다. 다행히도 원래 그게 제 자리였던 것처럼 리본은 아주 잘 어울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하진이 그제야 서라를 깨우러 갔다.
“서라야, 일어나자. 밥 먹고 어린이집 가야지.”
보통 때라면 서너 번은 더 불렀어야 일어났을 서라는 일주일 중 제가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라는 걸 자면서도 기억하고 있었던지 반짝 눈을 떴다. 서라가 기쁘게 외쳤다.
“엄마, 금요일이다! 금요일 공주님!”
“어, 그래.”
정말 괜찮으려나, 하며 하진이 잠시 멈칫했다. 미리 말해주는 게 나으려나 어쩌려나 할 사이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던 서라가 빼액 소리치는 바람에 하진은 고민 하나를 덜고 골칫거리를 하나 얻었다.
“엄마! 내 펜던트 어디 갔어?”
‘펜던트는 무슨 펜던트. 저 말은 또 어디서 배워서… 뜻도 모르면서 아무 데나 갖다 붙이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하진이 천천히 거실로 나갔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원피스를 부여잡은 서라는 숫제 통곡할 기색이었다.
“어디 갔냐니까…”
울먹울먹 하는 서라를 보며 하진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제발, 아무 생각이라도 좀, 제발. 그렇게 혼잣말처럼 되뇌던 간절함이 보답을 받은 것일까, 하진의 머릿속에 순간 딸깍 불이 켜졌다. 하진이 얼른 서라를 당겨 무릎에 앉혔다.
“그게 있지, 단추 요정이 가져갔어.”
“뭐?”
눈물이 그렁그렁하니 수직 낙하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서라가 뜻밖의 말에 하진을 쳐다보았다. 하진이 확신을 담은 어조로 말했다.
“진짜야, 엄마가 봤다니까. 오늘 아침에 우리 서라가 입어야 하니까 밤에 저기다 저렇게 꺼내 놨거든?”
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쿨쩍, 코 삼키는 소리가 났다. 하진이 티슈 한 장을 뽑아 서라의 코에 대어주었다.
“근데 갑자기 쏘삭, 쏘삭 하는 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까 단추를 달아놓은 실이 점점 헐거워지더라? 갑자기 이상하잖아. 그래서 엄마가 가만히 숨어서 봤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말?”
“응, 정말. 그런데 단추가 떨어질 것처럼 느슨해지면 이렇게 평평하게 되면서 실이 쭉 늘어나잖아?”
서라가 수평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아 하진이 손바닥을 가로로 눕혀 보였다. 서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있지, 그 단추 위에 엄청 쬐그만 여자애가 낑낑거리며 올라타는 거야!”
“거짓말!”
“거짓말을 왜 해, 엄마가! 엄마가 뭐가 아쉬워서!”
새하얗게 표백한 한마디를 강하게 덧붙인 하진이 눈썹을 치켜떴다. 하진의 과장 섞인 어조에 압도된 서라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걔가 단추 위에 올라타서는 발을 구르면서 그네를 타는 거야, 단추로. 얼마나 신나게 타던지, 엄마가 다 신이 나더라?”
“진짜?”
“응, 진짜. 그렇게 한 5분 발을 구르니까 옷에서 실이 툭 끊어지면서 단추가 떨어졌어!”
서라가 입을 헤 벌리더니 미간을 와락 구기며 소리쳤다.
“그네에서 떨어지면 다치는데?”
“그럴 것 같지? 근데 안 다쳤어. 바닥에 이렇게 착, 똑바로 서는데- 와, 엄마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슬쩍 말을 삼킨 하진이 서라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서라는 완전히 이야기에 넘어온 기색이었다. 서라가 하진을 재촉했다.
“그래서, 엄마. 어떻게 됐는데?”
“떨어진 단추를 이렇게 꼭 보듬어 안고 활짝 웃으면서…”
이야기를 어떻게 극적으로 마무리해야 좋을지 잠깐 고민하던 하진이 손뼉을 짝 쳤다.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더라? 거짓말처럼. 단추까지 사라져 버렸어.”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다!”
서라가 감격한 얼굴로 소리쳤다.
‘너야말로 이 이야기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하진이 고개를 떨어뜨려 서라와 시선을 마주대었다. 조금 전까지 시무룩하던 표정은 간 곳 없이 환했다.
“요정이 가져갔으니 서라도 이해할 거지?”
“응, 응! 그래서 엄마가 리본 달아놓은 거야?”
“맞아, 좀 아쉽지만 선물한 셈 치자, 응?”
서라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헤헤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하진은 혹시라도 단추를 찾으면 잘 감춰놓아야겠다고 다짐을 거듭했다.
[표제어_불현듯/모티브_크베타 파초프스카「모양놀이」]
사진: Unsplash의Annie Spra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