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풀이엽편 | 세심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어내는 마음

by 담화

오후 느지막이 화원에 출근하자마자 작업 테이블 위에 조롱조롱 줄지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포트분을 발견한 수하가 한숨을 흘렸다.

“일이 잘되는 건 좋은데, 한편으로는 싫은 건 왜지.”

“배부른 소리 한다, 응?”


언제 다가왔는지 하진이 장갑을 낀 손으로 수하의 등짝을 매섭게 내리쳤다. 움찔한 수하가 떨떠름하게 하진을 돌아보았다.


“누나, 기척 좀 내고 다녀요. 유령도 아니고 매번 뭐야, 정말.”

“지금 우리가 한탄 같은 걸 하면 안 되고요, 아이고 고객님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절이라도 하면서 택배 싸는 기계가 되어야 하거든요, 동업자 씨.”

“... 예, 깨우쳐 주셔서 새삼 감사힙니다. 사장님.”


하진이 깔깔거리며 풀어헤쳐놓은 상토자루 앞으로 돌아갔다. 한쪽으로 놓아둔 몸값 나가는 수입산 제라늄 분들이 때마침 꽃을 조롱조롱 물고 있는 것을 보며 앓는 소리로 감탄사를 내뱉는 것도 잊지 않고.

사정이 있다고 조금 늦게 나왔더니 수하 앞으로는 제일 성가시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 남아 있었다. 돌아가면서 맡고 있으니 힘든 일만 남겨 놨다고 불평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작업을 하려면 늘 손이고 마음이고 단단히 준비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포트분에 꼼꼼하게 물에 적신 페이퍼 타월을 밀어 넣어 택배상자에 넣을 식물들에게 수분 보충 작업을 하며 주문서를 확인하던 수하의 눈이 한 곳에 멎었다.


‘이분, 또 주문하셨네.’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아 있는 고객이었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조금 나쁘게 말해서 모든 것을 심사숙고하고 고민만 하다 결정하지 못하는 일도 부지기수일 것 같은 타입의 손님.

몇천 원도 하지 않는 관엽식물 하나를 주문하면서 그들 사업체의 소셜 계정으로 얼마나 꼼꼼한 질문을 하던지.

까탈을 부리는 진상이라기엔 한마디 한마디가 몹시도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는 듯 소심하여 수하는 결국 그 사람이 궁금해진 나머지 상대의 계정을 눌러보기까지 했었다.

첫 번째 주문은 푸밀라였다. 피쿠스 푸밀라라고 하는, 앙증맞은 이파리를 조랑조랑 달고 있는 덩굴성 식물이었다. 그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아마도 택배가 도착했으리라 생각되는 날 저녁에 그 계정의 주인은 수하와 하진의 화원 계정을 태그 하면서 푸밀라의 사진을 찍어 올렸다. 아주 명료하게, 그리고 수줍게 ‘정성껏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키우겠습니다’라고 적혀 있는 내용을 보며 하진이 이렇게 말했다.


- 이런 고객만 있으면 진짜 일할 맛 나겠는데.

- 어, 이런 고객이 무슨 고객인데요, 사장님?


힘쓰는 일을 주로 도맡아 하는 아르바이트생 윤준이 커피를 막간 휴식시간에 커피를 홀짝이다 말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미 어딘가 귀엽고 내성적인 감사의 메시지를 다 같이 돌려본 뒤였다.


- 딱히 설명은 못하겠는데, 그냥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들 있잖아. 그런 손님을 만나면 되게 힘이 되거든.

- 그런 걸 어떻게 느껴요?

- 우리 윤준이 아직 어려서 모르는구나... 세상을 겪다 보면 절로 알게 된단다...


하진이 어딘가 아련한 눈빛으로 갓 깨어난 보송보송한 병아리를 보듯 윤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윤준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수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 사장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형?


수하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 보낸 사람의 마음을 읽어준 거잖아, 받은 분이. 알아주면 고맙고 몰라줘도 할 수 없는 거지만, 보이지 않기 십상인 마음 어린 수고스러움을 누가 알아주면 기쁘잖아?

- 음, 그렇겠네요. 그런데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 아이고, 윤준아. 지금 학원에서 지문 강독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일일이 설명해 줘야 되겠냐? 그리고 커피타임 끝났어, 업무 복귀!


하진이 짝 손뼉을 치며 수하와 윤준을 자리에서 반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구시렁거리며 자리를 뜨는 윤준을 보며 피식 웃는 수하를 붙든 하진이 불안하게 물었다.


- 야, 한수하. 우리 이렇게 늙어가는 거냐? 나 조금 전에 진심 ‘요즘 애들은...’ 이럴 뻔했다니까?

- 사장님, 누나, 양심 있으면 전 빼주세요. 전 아직 누나보다 네 살이나 젊...

- 똑같이 앞자리 3인 주제가 별소릴 다 하네?


가당찮다는 음성이 희미해지는 순간 현실의 하진의 목소리가 냉큼 그 자리에 덮쳐 들었다.


“한수, 도대체 뭐 하느라 포장하다 말고 멍 때리고 있어?”

“아, 미안해요. 잠깐 뭣 좀 생각이 나서.”

“뭐가.”


하진이 궁금한 듯 고개를 숙여 수하의 시선이 향해 있던 문자열을 훑었다. 하진이 경망스럽게 휙 휘파람을 불었다.


“이분 특이하네? 보통 배송료 아끼려고 기본 금액 넘겨서 주문하는데. 지난번에도 그러시더니...”

“신중한 것 같지?”

“신중... 인가? 으아, 나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데.”

“그야 누나는 대책 없는 큰 손이고...”


수하가 피식 웃으며 다시 상토 위에 젖은 페이퍼 타월을 눌러 넣었다. 종이를 가볍게 구겨 볼륨감을 주어 빈자리에 밀어 넣으며 수하가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푸밀라에 페페로미아라. 혹시라도 다음번 주문을 하실 때는 조금 콘트라스트가 있는 녀석이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베란다 조경 서비스까지 사업 확장하시게요?”


하진의 핀잔에 수하가 고개를 슬쩍 가로저었다.


“그런 게 아니고. 큼지막하고 시원시원한 잎을 보면 뭔가 좀 탁 트이는 그런 기분 드는 거 있잖아.”

“아, 알지- 알지.”

“지난번에 우리한테 굉장히 주저주저하면서 문의하실 때도 그랬는데, 어쩐지 느낌에 조심성도 많고 소심한 성격이실 것 같아서.”


하진이 오, 하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더니 냉큼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야, 그거 괜찮을 거 같은데?”

“뭐가 괜찮아?”

“고정손님한테 이런 거 키워보실래요? 하는 추천목록 같은 거 만드는 거지. 왜, 인터넷 서점에 로그인하면 누구누구 님이 좋아하실 만한 책, 이렇게 뜨잖아? 그거 비슷하게.”

“그런 걸 어떻게 해. 애초에 우리는 포털 스토어에 입점한 처지고...”

“이럴 때 아날로그 감성으로 가는 거지. 손 편지로 짤막하게 쓰는 거야! 지난번 주문하신 초록이는 잘 키우고 계신가요? 이번 주문도 감사드립니다. 혹시 이런 초록이는 어떠실까요? 조심스레 추천드려 봅니다- 뭐 이렇게 쓰는 거지. 어때?”


수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은 아이디어긴 한데, 누나. 그거 누가 하는 거죠?”




[표제어_세심하다/모티브_임이랑 「아무튼, 식물」]

사진: UnsplashAndrea G사진: UnsplashZhen H


참조: 피커스 푸밀라 https://en.wikipedia.org/wiki/Ficus_pumila

페페로미아 https://en.wikipedia.org/wiki/Pepero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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