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는 숨기고 싶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사그락, 사그락.
발밑에서 플라타너스 낙엽이 아무런 저항 없이 바스러져 갔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신윤수의 입꼬리가 살짝 들렸다 누가 볼세라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어폰 덕에 귀에 달아둔 음악이 쫀득한 캐러멜처럼 감겨 한결 흥이 났다.
“오, 대박인데.”
한 걸음 앞에 지금까지 밟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의 잎이 바닥에서 바람을 못 이기고 좌우로 비틀비틀거렸다. 윤수가 입맛을 다셨다. 250, 여학생치고는 발이 큰 윤수의 일명 삼디다스 슬리퍼가 바닥을 쓸고 다니던 익명의 플라타너스 낙엽 1을 장렬하게 짓밟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파삭, 하는 소리가 났다. 그까짓 버석버석하게 마른 낙엽을 밟는 것이 무슨 다른 감각을 자극할 리도 없건만, 윤수는 발바닥에서부터 찌르르하게 느껴지는 시원한 쾌감에 저도 모르게 활짝 웃어버렸다.
딱히 지금껏 누가 뭐라고 한 적도 없건만, 윤수에게는 이것이 차마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자잘하게 야무지게 부서진 낙엽을 치우는 일이 얼마나 번거로울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윤수는 그런 성격이었다. 자신이 한 행동이 불러올 수 있는 크고 작은 결과에 대해 고심하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기만 하면 자석에 가서 들러붙는 쇳가루처럼, 어느새 낙엽을 밟으며 즐거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평평하게 마르는 은행잎이나 단풍잎은 밟는 재미가 없었다. 이 계절의 최고 도락이 낙엽 밟기인 윤수에게 아무런 청각적 즐거움을 주지 않는 납작한 낙엽은 낙엽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런 면에서, 윤수에게 최고의 가로수길은 누구처럼 메타세쿼이아 길도, 이팝나무 길도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으로 한 계절의 중요한 흥취를 담당하는 나무들이었으나 윤수에게는 아니었다. 그러니 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하굣길에 제법 촘촘히 심겨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며 윤수가 가을을 손꼽아 기다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떨어진 낙엽을 패기 있게 밟아 부수며 윤수가 뇌까렸다.
“이 맛이지…”
“갑자기?”
잔잔한 노랫말 사이로 불청객이 끼어드는 바람에, 제 감탄사를 들었을까 봐 뜨끔해진 윤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반의 김진이었다. 좋게 말해서 넉살이 좋은 동급생. 윤수의 속내로 말하자면, 낄 데 안 낄 데를 절대 구분하지 못 – 못인지, 안인지- 하는 눈치라는 현대인의 중요한 사회생활 능력치가 최하위를 기록하는 녀석. 키득거리며 다가오는 김진을 힐끗 보던 윤수가 화제 전환을 시도해 봤다.
“넌 셔틀 안 타?”
“아, 난 바로 건너편 단지 살아서.”
금세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 오는 모습에 아마도 보지 못했나 보다 싶어 안도의 한숨을 흘린 윤수에게, 진의 한마디가 다시 역습을 시도했다.
“그런데 뭐가 무슨 맛?”
망할. 다 봤나. 윤수는 화제 하차를 시도했다.
“아, 노래 좋다고.”
헛된 시도였다. 진이 씩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윤수의 발치를 가리켰다.
“그거, 나도 아는 맛인데.”
“어?”
난데없는 소리에 갈피를 놓친 윤수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진이 갑자기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가 냅다 쿵 구르며 피식 웃고 미끄러진 가방끈을 추슬러 멨다.
“재밌잖아, 이거. 어릴 때 생각도 좀 나고.”
설마 하니 자신의 기분에 동조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조금 당황한 윤수가 입만 뻐끔거렸다. 윤수의 반응이야 이러거나 저러거나, 혼자 흥이 오른 진의 발밑에서 플라타너스 낙엽이 와사삭 바스슥 소리를 내며 연달아 운율을 맞추어 가을 소리를 냈다.
“왜 내 눈치를 봐? 이거 재밌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건 그런데, 너 너무 세게 밟는 거 같아서. 심하게 많이 바스러지면 나중에 치우시는 분들이 힘드니까.”
“야, 너 진짜…”
늘 유들 거리던 진의 입이 그 찰나만큼은 할 말이 찾아지지 않았는지 접착제를 바른 것처럼 딱 다물렸다. 윤수가 무슨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금세 제 모습으로 돌아온 진이 다다다닥 쏘아붙였다.
“너 진짜 인생 피곤하게 산다. 맨날 그렇게 남 눈치 보면서 살아? 아니 뭐, 그래, 네 말이 맞기도 하겠지. 근데 말이다. 아까 너 신나라 하는 거 뒤에서 딱 보니까 완전 그 정도면 무아지경의 경지던데. 그 와중에도 적당히 하고 그만해야지, 계속 그 생각하고 있었다고? 질린다, 질려.”
울컥한 윤수도 지지 않고 대거리했다. 억울한 마음이 차올랐다.
“야, 그게 사회생활 스킬이야. 더불어 사는 사회 몰라?”
“아니 그럼 아예 첨부터 쓰레기를 만들지 마시던가요. 네가 생각하는 적정 수준이 청소하시는 분들한테도 적정 수준인지는 어떻게 아는데? 이제 보니 신윤수 내로남불이네, 아주.”
“그 말이 아니잖아!”
“그 말이야.”
단정적으로 말한 진이 가만히 윤수를 보았다. 삼킨 말이 목에 걸려 있는 것이 뻔히 보였기에 울컥한 윤수가 내뱉었다.
“할 말 있으면 다 해 버리지, 왜? 뭘 또 새삼 생각해 주는 척이래?”
“그게 네 길티 플레저야?”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전투태세로 돌입하려던 윤수의 성난 마음이 뒤통수를 기습당한 듯 붕 떠버렸다.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헤벌어진 표정을 감상하던 진이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맞나 보네.”
“아니, 시비를 털려면 털고, 말려면 말고, 하나만 하자? 정신 사납게 뭐야, 이랬다 저랬다.”
“신윤수,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이왕 할 거면 마음 비우고 당당하게 밟아. 그렇게 숨어서 몰래 그러지 말고. 더 음침하잖아. 그냥 시원하게 밟아버리라고. 그까짓 낙엽 좀 밟는 거 가지고 무슨 대역죄인처럼 눈치 보면서 그러지 말고.”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작은 즐거움을 누리려고 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질타를 들을 일인가, 싶어진 윤수가 홱 돌아섰다. 그 뒤에다 대고 진이 소리쳤다.
“한이하가 어제 왜 야자 제꼈는지 알아?”
“걔가 갑자기 왜 나와, 여기서.”
윤수가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진의 목소리가 장난기로 반들거렸다.
“궁금해?”
[표제어_은밀하다/모티브_악동뮤지션「시간과 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