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풀이엽편 | 덧없다

이렇게 벼르고 별렀는데!

by 담화

“학우님, 튀십니까?”


이하가 그대로 멈추어 섰다. 빈들거리는 말투가 그대로 뒤통수에 부딪히더니 저희들끼리 낄낄대며 흩어졌다.

“뭐냐, 김진.”

“뭐긴, 야자 도우미로서 출결 체크에 미력한 도움이나마 보탤까 해서 그러지.”

“적당히 둘러대 줘.”


이하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진이 기름 바른 듯 매끄러운 악당의 미소를 지었다.


“맨입으로?”

“맨입으로.”


이하는 두 번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정문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빠르게 도망치는 이하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피식거리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자식아.”


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이하는 때마침 도착한 605번 버스에 올랐다. 집까지는 20분이면 도착한다. 야간자율학습을 제끼고 얻은 귀중한 세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었다. 택배 왔더라, 하는 수하의 문자를 받자마자 이하는 당장 집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 버렸다.


어차피 일반판으로 나왔을 때 독파했기에 내용이야 뻔히 다 알지만, 완전판은 또 다른 맛이란 말이지. 혼잣말로 중얼거린 이하의 입꼬리가 쓱 치켜 올라갔다. 한이하의 인내심은 발군이었다. 기어코 일 년 남짓을 기다려 완전판 마지막권이 출간된 것을 확인하고서야 한꺼번에 장바구니에 담기 버튼을 누르면서, 아무도 칭찬해 줄 리 없지만 혼자 세상 뿌듯한 감각을 느꼈던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자부심과 충만감이 찰랑찰랑 넘실거렸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가 위아래로 리드미컬하게 까딱거렸다.

삐리릭, 현관 도어락이 열리자마자 누가 왔나 확인하듯 고개를 내밀었던 하얀 털북숭이 얼굴이 애옹 울더니 고개를 도로 집어넣었다.


“비비, 밥 주는 오빠한테 냉정하네.”


너 같은 오빠 둔 적 없거든, 하고 대꾸하는 것처럼 도도하게 홱 들어가 버린 고양이의 뒤꼭지에다 대고 투덜대던 이하가 재빠르게 거실을 훑었다. 제법 크기가 되어 보이는 택배박스를 발견한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잔소리쟁이 형 수하가 있었으면 손 씻어라, 가방 제자리에 가져다 놔라 등등 잔소리가 쏟아졌겠지만 외출했는지 집은 비어있었다. 쾌재를 부르며 박스를 뜯은 이하가 단단하고 야무진 커버 비닐을 조심조심 벗겨냈다. 낯익은 캐릭터들의 얼굴을 다시 보는데 순간 코끝이 시큰해졌다. 처음 그 작품을 봤을 때 이하가 열한 살이었던가, 열두 살이었던가. 열여덟이 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어린애가 본다고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싶은 심오한 철학적 이슈가 가득한 내용이었다.

그땐 무엇을 보고 홀딱 반했더라. 표지를 손으로 쓸어보던 이하가 인상을 찡그린 채 기억을 더듬었지만 도무지 짚이는 게 없었다.


-엄마는 너희가 저런 폭력적인 내용으로 뒤덮인 걸 보는 게 정말 싫어.


당시 한창 뒤늦은 사춘기를 겪던 수하가 한 말이 압권이었다.


-엄마가 모르는 건지 인정 못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엄마들이 못 하게 한다고 해서 애들이 안 하는 게 아니야. 몰래 하는 거지. 그리고, 세상에 남의 몸에 손도 까딱 안 하고 휘두를 수 있는 폭력이 얼마나 많은데? 주먹다짐이라고 다 폭력이고, 말로 한다고 폭력이 아니에요?


엄마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처음으로 엄마의 간섭을 벗어나, 수하의 옹호 아래 날 것으로 거친 액션활극을 보는 맛이란. 엄마의 말문을 막았다는 유치한 승리감에 도취됐던 수하가 인심 좋게 빌려줬던 그 책을, 이하는 보물처럼 소중히 아껴 읽었다. 페이지가 낱낱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그것을 애써 수선해 주었더니 수하는 진저리를 치며 그냥 네가 가져라, 하고 이하에게 주어 버렸다.

그러나 한때 그렇게 엄마의 폭정에 항거하는 동지였던 수하는 20대 중반을 훌쩍 넘어가더니, 당연한 것처럼 사상변절자가 되어서는 헤벌쭉한 얼굴로 시리즈 완전판을 주문하는 이하를 보며 팔짱을 낀 채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한이하, 그런 거 적당히 좀 봐. 다 한때 보고 끝내야지, 아직까지 사람이 사람을 찌르고 쏘는 게 태반인 것만 보면 어쩌자는 거야.


'뭐지, 이 갓 태어난 신선하다 못해 풋내 나는 꼰대는...'

경악하고 싶어진 이하가 입을 벌린 채 수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언제는 공부가 다가 아니라며. 뭐든 좋아하는 거에 건전하게 열중할 수만 있으면 오케이라며?


수하도 자신이 한 말에 조금쯤은 무안했는지 뺨을 슥슥 긁다가 딴청을 부렸다.


-아니, 내 말은... 넌 너무 오래가는 것 같아서.

-형처럼 말초적 통쾌함을 위해서 보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아니, 나도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하가 보란 듯이 마우스를 콱 눌러 주문을 완료하며 제 말에 구두점을 찍었다.


-못 믿겠으면, 제대로 된 리뷰라도 하나 써 줘?


말을 뱉은 이하의 얼굴과 그 말을 주워 새긴 수하의 표정이 한 점에서 만나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튕겼다. 이하가 후회막심으로 안색을 구김과 동시에 수하는 환하게 웃었다.


-기꺼이. 기다릴게.


'진짜, 입 한 번 잘못 놀려서는.'

입은 투덜대면서도 이하는 비닐을 모아 구기고 책들을 순서대로 쌓아 올렸다. 수하에게 장담한 바도 있으니 정독할 구실은 충분했다. 감상글을 써주겠다고 호언장담했으니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소파에 드러누워 행여나 제본이 망가질까, 신중하게 책을 적당한 각도로 펼친 이하가 조심조심 페이지를 넘겼다. 간혹 녹음 앱을 켜서 뭐라 뭐라 중얼거리기도 했다. 언제 도로 나왔는지, 그런 이하를 심상하게 보던 비비가 훌쩍 뛰어올라 발치에 자리를 잡더니 몸을 늘였다. 다리와 소파 등받이 사이의 빈 공간을 토실토실한 고양이가 꽉 메우니 발목 언저리가 적당히 뜨뜻해지는 것이 퍽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너무 푸근하게 좋아진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두 시간이 훌쩍 흘렀을까, 저녁 시간이 지나 귀가한 수하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다 말고 우뚝 멈추었다. 제멋대로 야자까지 빼먹은 게 분명한 이하가 얼굴에 책을 덮은 채 고롱고롱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한 수하가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아주 그냥, 작정하고 튄 것 같더니 패기 넘치게 낮잠 자는 게 전부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비가 애옹애오옹 울었다. 이하가 들었다면 바짝 약이 오를 만한 울음소리였다. 이하의 얼굴에서 들어 올린 책은 하필, 주인공이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이 든 챕터 일러스트 페이지에서 멈춰 있었다. 수하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너무 계획에 힘주면 안 된다니까.”




[표제어_덧없다/모티브_아라카와 히로무 「강철의 연금술사」]

사진: UnsplashAndrea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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